여기 그 길
세월이 약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지난 일은 모두 그리워진다. 이런 문구를 수시로 주문하듯 되뇌곤 했다. 내 생활과 존재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부정되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생각했다. 기대와 짐작이 늘 어긋나고 빗나가던 즈음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구체적인 현장감은 희미해졌다. 이번 일정은 내게 새로운 발견이나 얻음이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 극기 훈련에 가까웠던 당시 여행이 오래도록 나를 서있게 할 것이다.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으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기세등등한 여름 햇볕에 더욱 기가 질리는 한낮이었다. 동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전철로 갈아탄 후 다시 이동해 오후 5시, 인천 연안부두 국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중국 단동까지 가는 동방명주호에 입선했다. 수십 명이 함께 들어가는 선실이었다. 칸막이도 없이 베개, 매트리스, 이불 하나씩 차지했다. 휴대폰이 끊기기 전, 아들과 통화했다. ‘잘 갔다 와’ 흔한 말이 유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고 기억한다.
12시간 넘게 배에서 보내야 한다. 짐을 줄이기 위해 읽을거리를 챙기지 않았다. 옆자리를 보니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 있다. 그 책을 빌려 몇 번 목을 넘는 뜨거움을 삼키며 단숨에 읽었다. 배가 먼 바다로 들어서며 움직임이 커졌다. ‘혼자 오셨어요?’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감탄과 부러움의 한 마디씩을 들으며 각각의 인식에 대한 다름과 먼 거리를 느꼈다. 내가 혼자인 여행객을 만난다면 그는 얼마나 큰 혼란 중에 있을까를 먼저 생각할 것 같다.
이번 여행은 크게 백두산 서파코스, 고구려유적지, 압록강을 답사하는 일정이다. 지역으로는 요녕성 선양과 단동에서 길림성 통화, 집안(424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까지 오가게 될 것이다. 선양은 중국에서 북경, 상해, 천진에 이어 4번째로 큰 도시이며,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도시다. 중국 동북공정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온전히 관광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낯섦과 새로움이 주는 긴장과 자극이 생각보다 앞서 본능적으로 단순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잠이 들었으나 의식의 반이 깨어있는 반수면 상태로 밤이 지나고 새날이 밝았다. 배에서 아침을 먹었다. 모든 게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 배에서 내린 후, 단동 항의 출입국관리소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중국경찰인 공안이 촬영을 금지하며 지키고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한 대의 버스가 되풀이 왕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멀쩡한 의자 하나 없이, 곧 엔진이 멈출 것처럼 불안해 보이는데다 귀가 멍하도록 소음이 심한 늙은 버스가 앞으로의 험난한 일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북쪽이라 더위가 심하진 않았다. 버스에 올라 대학생인 가이드와 인사를 나누고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중국 음식은 우선 넉넉한 양에 놀란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낮은 편이라 낯선 요리는 먹어볼 마음이 없다. 성분 파악이 확실히 보이는 것과 괜찮다며 먹어보라고 권하는 음식만 조금씩 맛보았다. 남은 음식 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식사 때마다 괜한 걱정이 들곤 했다.
많은 시간을 이동하는 버스에서 보냈다. 다리를 펴기 위해 길가에 잠깐씩 정차하기도 했으나 5~7시간씩 버스 안에서 보내야 했다. 주 농작물이 옥수수인 지역답게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 밭이 이어졌다. 시골길에 소떼와 양떼가 자유롭게 버스를 가로막아 멈추거나 피해 가고, 개울에 나와 빨래하는 사람도 보이고, 빨간 지붕을 얹은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일정간격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리고 그쳤는데 도로에 물이 빠지지 않아 잠깐 내린 비에도 엉망이 되었다. 차들은 중앙선을 지키지 않았고 안전벨트가 없었다. 점잖은 식당 안에서도 남자들은 보통 웃통을 벗은 채였다. 여기선 흔한 모습이라고 한다.
멀리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이 보이는 곳에 버스가 정차하고 근처 농가의 화장실을 신세지게 되었다. 두 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에 칸막이가 없었다. 난처하고 민망하였으나 도리 없이 나란히 앉아 급한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버스는 몇 번씩 자고 일어나도 달리고 있었다. 나중엔 절로 신음이 나왔다.
광개토왕(의도적으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음) 비와 능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광개토대왕릉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입구에 장사치 느낌의 조잡한 기념품 파는 상점 몇이 있고 넓은 주변은 마구 자란 풀밭이었다. 버려진 야산처럼 보이는 능의 위쪽 석관 입구까지 계단으로 오르는데 그곳은 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사면 유리로 보호하고 있는 비석 아래에는 관광객이 던진 여러 나라의 동전과 지폐가 흩어져 있다. 광개토대왕릉은 아들인 장수왕릉과 서로 바라다 보인다. 혹자는 장수왕릉의 규모로 보아 왕이 아닌 당시 어떤 장군의 묘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한다. 장수왕 둘째 부인의 지석묘도 장수왕릉 바로 옆에 있다. 첫째 부인은 왕과 함께 합장했다.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쪽기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호산장성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가이드가 고구려 연개소문이 축조한 천리장성의 일부라고 설명한 이 호산장성은,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압록강을 방어하기 위해 전략 거점으로 쌓았던 ‘박작성’인 것으로 여러 조사에서 드러나며 방영되기도 했다. 중국은 1990년대부터 압록강 변에서 만리장성의 흔적을 찾다가 박작성과 함께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자 이를 서둘러 은폐하고, 그 자리를 가짜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둔갑시켜 완공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때 건축한 것이라며 호랑이가 누운 형태라고 하여 '호산장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 성을 대대적으로 복원하면서 옛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빠른 리듬의 한국가요가 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기막힌 우연에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근접한 거리에 중국과 북조선이 한 발 차이라는 ‘일보화’가 있다. 날카로운 눈빛의 군인이 경계근무 중인 뒤 좁아진 강폭이 서로 닿을 듯했다. 돈을 내면 나룻배로 강줄기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는 말에 내려가다가 가이드 만류로 포기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몰래 촬영하다 군인에게 카메라를 뺏기고 말았다. 옥신각신하다가 요구하는 만큼 돈을 주고서 카메라는 돌려받았다. 유람선을 타고 6.25 때 끊어진 압록강 철교와 함께 둘러볼 수 있었던 북한의 방산(만포) 마을과 얼마 기간을 계약으로 나와 있다는 북한 식당을 통해 북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산들은 모두 민둥산이고 산꼭대기까지 밭을 일구는 모습이었다.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오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는 일 년에 70일 정도만 볼 수 있다는데 천지를 볼 수 있는 운이라도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준비해 백두산(장백산)으로 출발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가는 빗줄기가 오락가락했으나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진다고 한다. 버스로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른 후 내려서 걸어야했다. 우비 하나씩 받았다. 천지를 볼 수 있는 정상까지 1,340계단을 올라야했다. 분명 7월인데 한겨울이 무색했다. 비바람이 얼마나 모진지 입고 있던 우비가 다 찢어지고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주변 야생화가 장관이라 들었지만 겨우 보이는 발밑의 키 작은 꽃이 얼어 죽지나 않을까 염려될 뿐이었다. 머리서부터 신발 속까지 모두 젖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정상에 올랐다.
사진으로 수없이 본 천지의 모습은 없었다. 바로 밭 밑에서부터 전부가 안개구름이었다. 정말 무엇에 홀린 듯이, 여기를 벗어나 제대로 길이나 찾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납고 몽롱한 날씨였다. 돈을 받고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인력거가 길가에 버려진 모습도 묘한 기분을 주었다. 성한 우비가 하나도 없었다. 천지에서 내려와 버스로 이동하면서 계속 어지러웠다. 신발과 옷이 젖어 꿉꿉한데다 멀미가 났기 때문이다. 산 아래는 이슬비가 얌전히 내리고 있었다. 천지에게 거부당한 서운함은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만들어낸 금강대협곡을 보며 조금 가시었다. 검회색으로 굳은 용암을 피해 군데군데 푸르게 살아있는 나무와 풀이 깊은 V자를 이루며 뻗어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실처럼 계곡을 감아 돌며 빛나고 있다.
오고 가는 날 배에서 이틀, 중국에서 이틀은 휘풍호텔 하루는 국문호텔에 들었다. 저녁이 되면 광장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모여 운동, 놀이, 춤을 추며 공연도 즐긴다. 중국의 인구를 15억~18억으로 추정하는데, 인구 억제정책을 하고 있지만 시골에서는 아이 낳고도 출생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상상이 안 가는 숫자이지만 늦은 저녁 광장으로 몰리는 사람들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빽빽하였다. 그 속에서 어느 때보다 혼자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며칠이었다.
난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었다. 거대한 먹이사슬 구조 하위 어디쯤 내 삶은 겨우 껴있을 뿐이다. 한층 겸손해지고 초라해져서 돌아왔다. 여기가 바닥이라면 바닥을 딛고 솟아오르고, 더 내려가야 한다면 어디가 끝인지 가보자는 날선 오기가 꿈틀거리는 걸 느낀다.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