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천지 허구 많은 사람덜이 있어두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by 연이은
달력.jpg


연말이 다가오면 새해 달력을 만나게 된다. 수량이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연말연시를 느낄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둘둘 말려 우편으로 온 달력의 검은 글씨가 먼저 시선을 잡았다. 벽에 걸었다. 익히 들어온 그러면서도 생소한, 정겨운 충청도 사투리가 볼 때마다 마음 한 자락을 붙든다.


1월, 올이는 셍편이 점 낫어질테니께 힘내유

올해는 형편이 좀 나아질 테니까 힘내요. 이젠 연말연시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거나 여러 계획을 세우기보다 그냥, 무심히 보내고자 정신을 고른다.

2월, 즐기는 그저 등 따숩구 배불르먼 최고유

겨울에는 그저 등 따스하고 배부르면 최고지요. 三餘(3여)가 생각난다. 인생에서 3가지 여유로움을 즐겨야 한다. 하루는 저녁이 여유로워야 하고, 일 년은 겨울이 여유로워야 하고 일생에선 노년이 여유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농부가 일 년 내 애써 농사지어 광에 곡식이 풍성하면 한겨울에도 느긋할 일이다.

3월, 당신은 꽃마냥 이쁘구 승격두 좋네유

당신은 꽃처럼 예쁘고 성격도 좋네요. 곧 봄이다. 괜스레 휘뚜루마뚜루 들쑤시는 봄바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기운을 받아 앞 다투어 꽃들은 피어나겠다. 누군가 내다 버린 화분을 데려와 살려내고픈 의욕이 덩달아 솟는 시기이다. 난 생각의 잔가지를 쳐낼 필요가 있다.

4월, 일철나기전이 꽃구경 많이 허유

일할 철이 다가오기 전에 꽃구경 많이 해요. 4월은 봄밤 마당으로 나서볼 일이다. 큰길, 좁은 길, 길목마다 꽃으로 환한 어둠을 만나 호들갑쯤 피우며 봄을 만끽해 볼 일이다. 꼭!

5월, 누덜 에미애비 고상헌거 쬐끔이라두 생각헤본겨?

너희들 어미아비 고생한 거 쪼금이라도 생각은 하는 거야? 어느 해 어버이날이 주일이었나? 미사시간에 신부님이 어버이은혜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하셨다.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일생을 자식 위하여’ 하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흘렀다. 여기저기 눈가로 올라가는 손길을 느꼈다.

6월, 날 뜨거니께 뭐 점 쓰구 댕기유

날 뜨거우니 뭐 좀 쓰고 다녀요. 자외선이 무서운 시기다. 요즘은 걷기 전에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지수, 자외선 지수, 바람의 세기를 날씨앱으로 확인한 후 움직인다. 그래서 편리한 세상인지는 모르겠다.

7월, 그전이 냇갈서 멱감구 놀던 때가 좋았슈

그전에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놀던 때가 좋았어요. 개울에서 물고기 잡고 올갱이(다슬기) 잡던 어릴 적 추억에 멱살 잡혀 제천천이 끼고도는 시골마을에 오래된 집을 장만했다.

8월, 휴가철인디 애덜이랑 워디 점 댕겨왔남유?

휴가철인데 애들이랑 어디 좀 다녀왔나요? 나이 들면 혼자 잘 놀아야 한다. 가족관계증명서를 일반으로 떼면 나와 부모님만 나온다. 상세로 떼야 자식이 보인다. 성인 된, 출가한 자식은 예전에 가족이었던 관계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9월, 인저는 더위두 얼추 끝나가니께 살겄슈

인제는 더위도 얼추 끝나가니까 살겠어요. 지루하게 이어지던 염천 더위의 기세가 꺾이면 부쩍 가벼워진 바람이 반갑고 귀하다. 봄과 다른 건조함이 열매를 위한 마지막 화려함으로 찬란하고, 물러서 돌아앉는 뒷모습이 쓸쓸하다.

10월, 베바심 허너라구 탑세기 많이 묻었슈

벼를 타작하느라고 솜먼지 많이 묻었어요. 추억은 때로 집요하다. 무논에 바글바글한 올챙이와 벼이삭 뒤로 몸을 숨기던 메뚜기, 너른 들에 짚가리 듬성듬성한 논바닥을 뒤지던 기억으로, 논길을 걷는 머릿속이 와글와글하다.

11월, 짐장 당겄으니께 즐기두 걱정읍슈

김장 담갔으니 겨울도 걱정 없어요. 기력이 점점 약해지는 엄마는 김장을 담그며 매번 올해가 마지막이다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다시 김장철이 오면 서운하니 조금만 담을까 하신다. 엄마에게 겨울양식은 여전히 김장이다.

12월, 올이두 사느라구 증말 욕봤슈

올해도 사느라고 정말 고생했어요. 4계절의 시작은 겨울이다. 겨울, 봄, 여름, 가을이 맞다. 봄여름 왕성한 성장을 지나 가을에 결실을 내놓으며 끝을 맺는다. 엄마 뱃속에서 생명이 자라나듯 혹한의 겨울 땅속에서 치열하게 생은 시작된다.


달력_3월.jpg


작가의 이전글길 위에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