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열흘 전부터는 매일 아침 저녁마다 내가 갈 지역들을 즐겨찾기 해놓고 날씨 예보를 들여다봤던 것 같다. 출발 2~3일 전에는 확정적으로 비가 오고, 다시 돌아올 즈음에는 큰 태풍이 지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 사이의 내가 여행하는 기간은 비가 온다/안온다로 예보가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며 오락가락했다. 특히 7일간의 여행 중에 단 하루 머물 가라쓰는 비가 오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이 날의 맑은 날씨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이 날 아침에 호텔에서 나와서 본 하늘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호텔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가라쓰 성에 올라오니 한 켠이 공사중이었다. 안내판을 보니 뭐시기 30년 3월까지 공사라고 한다. '어제 하루동안 돌아다니면서 뭐시기 29년이라는 걸 많이 봤던 것 같은데'하고 보니 공사는 내년까지인가 보다. 일본은 연호를 흔하게 쓴다는 걸 직접 와보고서야 알게 되다니. 아무튼 오사카에서 보지 못한 하얀 성을 봤으니 됐다 하고 있는데 공사장 인부 한 분께서 저기 뒷길로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뒷길로 돌아가보니 가라쓰 성 천수각 입구가 거기에 있었다. 천수각 주변만 공사중이고 내부 박물관과 5층 전망대는 입장이 가능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서찰들과 그림들을 지나치다가 우리나라가 그려진 지도를 보고 잠시 멈춰섰다.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라쓰 지역 북부에 '히젠나고야(肥前名護屋) 성'을 쌓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초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고 전쟁이 끝나자 역할이 끝난 히젠나고야 성을 다시 허물었고, 그 즈음 가라쓰 성을 지으면서 히젠나고야 성에서 나온 돌을 다시 사용했단다.
이 날은 카가미야마(鏡山)의 전망대까지 가벼운 등산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날씨를 보러 일부러 아침 일찍 가라쓰 성 전망대까지 올라와봤다. 푸른 하늘에 시정도 좋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 전부터 고대하던 소나무 숲 니지노마쓰바라(虹の松原)를 멀리서나마 내려다보니 가슴이 벅찼다.
지난 밤 가라쓰 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봐놓았던 구 가라쓰 은행(旧唐津銀行)을 잠시 들렀다. 며칠 후에 갈 사가(佐賀)시에도 이런 근대 건물이 꽤 남아있다고 하던데. 내가 찾아 본 가라쓰나 사가 지역 말고도 일본은 곳곳에 이런 근대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고 한다. 내부에 크게 눈에 띄는 전시품은 없었지만, 삐그덕 거리는 나무계단, 내부장식, 벽난로와 거울 등이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눈길이 많이 갔다. 현대의 은행은 구 가라쓰 은행의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멋있다.
내 목적지 니지노마쓰바라 역까지는 단 2정거장 거리였는데, 이런 시골마을 역에 플랫폼이 4개라니. 안내 전광판에 영어가 표시되지 않아 역무원에게 물어봤는데 영어가 안된다. 구글지도의 열차 출발 시간에 맞는 열차를 골라탔더니 다행히 맞았다. 구글지도님의 손을 놓치면 난 미아가 될거야 아마.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어 바깥을 구경하면서 니지노마쓰바라 역에 도착했다. 여기는 검표원도 없고 개찰구도 없다. 다른 역에서 산 표는 그냥 통에 넣고 가란다. 한쪽에선 큰 소나무들이 천천히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다른 한쪽은 파란하늘 아래 시골마을이 펼쳐져 있다. 혼자 간이역에 서있었던 그 순간이 얼마나 평화롭고 좋았는지 모른다.
카가미야마에 올라가기 전에 커피를 한 잔 하려고 찾아놓았던 계란색 케이크 가게(たまご色のケーキ屋さん)에 갔다. 이 근처는 주택가와 논밭이 쭉 늘어서 있고 상가는 커녕 편의점이나 구멍가게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주택가 사이에 귀여운 상호를 가진 가게가 있다는게 너무 반가웠다. 대문 앞에서 세 분이 얘기를 나누시다가 나를 보고 동시에 꾸벅 하시길래 나도 꾸벅~하고는 '소박하구나' 생각하며 가게에 들어갔다. 조심스레 가게에 들어가니 커다란 쇼케이스가 있고, 조리복 풀세트까지 갖춰입은 세 분이 또 인사를 한다. '소박하지만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이구나' 생각했다.
가라쓰 역에서도 통하지 않았던 영어가 여기서 통할 줄이야. 조리복을 입으신 한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며 롤케이크 한 조각과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좋다. 차(茶)와 같이 도자기 잔에 얼음 몇 개 띄워 나오는 커피까지. 오늘 시간도 별로 없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들에서 발목을 붙잡히는 것 같다. 결국 여유롭게 앉아서 테이블마다 놓인 방명록까지 한 장 쓰고 나왔다. 나오면서 직원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소박하게 인사를 하니 따라 나오셔서 귀엽게 생긴 작은 팜플렛을 하나 쥐어주셨다.
예쁜 주택가와 논밭 사이를 지나고 지나 카가미야마를 오르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길을 가로지르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좁은 나무계단 등산로가 있길래 그 등산로를 선택했다. 등산로 끝까지 오르면서 속으로 내가 아는 욕을 대부분 했던 것 같다. 혹시나 덥고 무거울까봐 니지노마쓰바라 역 근처 숲 속에 삼각대를 숨겨놓고 올라갔는데, 카메라 마저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여행 전에 여기에 대해서 알아볼 때, 걸어서 올라갔다는 후기를 2~3개 정도 봤는데 그 분들 모두가 하나같이 걸어올라가지 말라고 했었다. 나는 그걸 보고도 '1시간 반정도 등산이면 괜찮은 거 아니야?(나는 고통을 빨리 끝내기 위해 서둘렀더니 1시간 정도 걸렸다)'하며 올라갔는데, 안괜찮다. 걸어 올라가면서 수십번 다짐했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서 나도 절대 걸어올라가지 마시라는 글을 쓰겠다고.
카가미야마는 사실 위에 장황하게 쓴 것만큼 대단히 높은 산도 아니고, 올라와보면 아예 국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전망대 2개, 신사 6개, 커다란 연못에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호텔까지 있다. 하지만 앞으로 등산에 대한 자신감은 버리기로 했다.
히레후리 전망대에서 카가미야마 전망대로 가는 길에 뜬금없이 갈림길이 나왔다. 더이상 오르막은 싫어서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두 길이 다시 만나는 지점에서 보니 오른쪽 길은 쭈욱 평지고 왼쪽 길은 쓸데없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무조건 오른쪽으로 가세요.
모니터를 통해서만 보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자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것들이 (잠시)사라지는 것 같았다. 섬들과 바다, 산, 숲, 논밭과 마을까지. 이것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게다가 해변을 따라 심어진 100만그루의 소나무가 이룬 숲은 여기서 보니 더욱 장관이었다. 빨리 니지노마쓰바라에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과 좀 더 이 풍경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함께했다. 가라쓰에 있는 동안 많은 곳을 돌아본 건 아니지만, 카가미야마 전망대는 가라쓰에 오면 반드시 (차를 타고)가봐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다리가 풀려버리면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가게 될까봐 구불구불한 도로를 걸어서 내려갔다. 중간에 색다른 풍경도 보고 고양이도 몇마리 만나다보니 내려가는 길이 올라갈 때보다 시간이 2배 가까이 걸렸다. 어떤 블로그에는 나처럼 도로를 걸어 내려가는데 지나가던 차가 보고 아래까지 태워줬다고 한다. 나 걸어서 내려갈 때 차 11대 지나갔다. '다이죠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도 미리 준비했는데 아무도 안물어봐줬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