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는 나는 일을 잘하는 승무원이지만, 실제 비행에서 나는 비행마다 하나씩은 실수를 하는 인간미 넘치는 복직 승무원이다.
경력도 어느새 12년이 넘고, 쉬었던 만큼 직급과 연차가 쌓여있어 복직한 후 많은 승무원들이 나를 어렵게 대하는 위치에 와 있었다.
다행히도 라인에는 이미 아기엄마인 팀장님들이 많으셔서 내가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다며 다독여 주신다.
'더글로리 2'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 주변에서는 그렇게 바쁘냐고 물어보신다. 한국에서는 아기 둘 엄마. 비행에 나오면 다시금 필요한 부분에 대한 비행 공부와 스테이션을 즐기기에 바쁘다.
힘들어도 비행이 좋다.
어느 정도 코로나가 종식되면서 매 비행 대부분 만석으로 예약이 되는 것이 앞으로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늘 그랬듯 늘 쉴 새 없이 바쁘게 비행을 다니겠지.
오늘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났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비행을 쉬었잖아. 어떤 부분이 가장 좋아?"
라는 그녀의 질문에 1초 만에 답이 나왔다.
"각 나라의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이 가장 좋아."
라고 답했다.
일본에서 먹는 조식은 여전히 정갈하고 맛있다. LA에서 먹는 치폴레는 진리고, 길가에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에서 먹는 에그베네딕트와 예쁜 케이크에 곁들이는 따뜻한 라테는 사랑이다.
또 언젠가 방콕 비행을 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픽업 시간이 이른 편이었다. 적어도 비행 전 5시간은 잠을 자야지만 날을 새고 한국에 와도 무리가 없기에 아침 10시부터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찌는듯한 방콕 날씨에 쇼핑몰을 향해 10분을 걸으니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이 더운 날씨에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이유는 단한 가지 바로수끼를 먹기 위해서이다.
한국과 2시간 시차라 오후 12시까지 아무것도먹지못하고 수끼를 위해 쇼핑몰로 달려가 환전을 하기 위해 환전소가 열리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30분을 기다리고 마침내 환전소가 열렸고, 100불을 환전하겠다고 말하니 여권이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늘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녔지만, 비행 오기 전 신용카드를 분실해 정지를 했기에 내 지갑엔 100불만이 덩그러니있었다.
잠깐 고민했다.
'그냥 호텔에서 룸서비스 먹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호텔로 여권을 가지러 돌아갔다. 마음속으로 울었지만,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나를 위로했다. 호텔에 도착 후 남편에게 여권을 놓고 갔다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 잠시 후 남편에게 고생한다는 답을 받았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쇼핑몰로 출발했다. 그렇게 다시 어렵게 어렵게 환전소에 도착했다. 어렵게 100불을 바트로 바꾸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수끼식당으로 향했다.
익숙한 이곳.
냄비에 고추와 마늘을 넣어 국물을 내고,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시켰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소스에 고추와 마늘을 추가했다.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고 있는데, 로봇이 음식을 내 자리까지 배달해 줬다.
'이곳도 로봇이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끓인 후 배추를 먼저 먹었다. 아삭한 식감과 소스가 잘 어울렸다. 그리고 탱글 탱글한 어묵을 먹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걸 먹으려고 비행하지.'
물론 이젠 한국에도 대부분의 음식들이 들어왔지만, 현지에서 먹는 특유의 맛이있다. 이렇게 고향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 큰 행복감이 찾아온다. 그렇게 더 이상 못 먹을 때까지 수끼를 먹고 250바트로 1시간 타이 마사지도 야무지게 받았다. 그리고 슈퍼에 들러 딸아이가 좋아하는 김과자와 옥수수 캐러멜을 샀다. 좋아할 딸 얼굴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호텔로 돌아오니 여권 때문에 1시간 가까이 걸었더니 한국점심시간인데도 스르륵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슬리퍼를 신고, 의자에 잠시 앉아 잠을 깼다. 다음 수화기를 들어 해산물 팟씨유를 시켰다.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또다시 행복해졌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비행 화장을 시작했다. 잠시 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호텔 책상 위에 놓인 팟씨유를 경건한 마음으로 한입먹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가 끄덕여졌다. 해산물은 신선했고, 새우는 통통했다. 딱 방콕 현지에서 먹는 그 맛이었다. 매콤한 소스인 삐끼뉴를 곁들여 먹으니 그 맛은 풍미를 더했다.든든하게 챙겨 먹고 다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로 향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실린 기내식은 또 왜 그렇게 맛있는지, 룸서비스를 먹었지만마치 밥을 안 먹은 사람처럼맛있게 기내식을 먹었다.
이제는 더 이상 다이어트를 하지 않지만 일이 힘든지 저절로 살이 빠진다. 보는 사람마다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해준다. 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 더 잘 챙겨 먹을 수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비행이 힘든 부분을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늘 비행은 끝이 있다. 그게 좋다.
육아도 대학원도 끝이 없는 장거리 마라톤 같아 지치고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그래서 더 끝이 있는 비행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세계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실이 너무너무 좋다.
예전선배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비행에 열정을 다해 다니는 편은 아니었었는데 그녀가 비행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 사실.. 비행 맛있는 거 먹으려고 다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크게 웃으며 공감했다. 팀선배였던 그녀는 먹는 것에 진심이었다. 유명한 피자집을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놓는 것은 기본이었으면, 파리에 유명 레스토랑으로 우릴 안내하기도 했다.
사실 난 비행과 학업을 병행하기에 급급해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열정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비행에서 정년을 앞둔 여자 사무장님이 하신 말씀 덕분에 이젠 전보다 더 스테이션에서 나가게 되었다.
"비행 후 피곤하겠지만 꼭 밖으로 나가요. 이제 곧 정년인데, 스테이션에서 피곤해서 밖으로 많이 나가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가 돼요. 이제 곧 그만 두지만 아직도 비행이 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피곤한 어느 날도 편한 옷에 작은 가방 하나 메고 밖으로 나간다. 그러면 곧 세계 여러 나라들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