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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김연지 Jul 14. 2018

스톡홀름 증후군? 첫 사수가 남편

이렇게 엄마가 된다-기자 선후배에서 기자커플, 기자부부로

2011년 3월, 그토록 꿈꾸던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었다.

꿈과 현실은 정말이지, 비극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던 시절이었다.

졸업 뒤 1년간 프리랜서와 언론고시를 병행해가며

어렵게 들어온 언론사인만큼,

이대로 그만두기에는 그간 쏟았던 노력과 열정이 아까웠다.

월급이 끊기는 현실도 막막했다.


그렇게 하루 잠 1~2시간만 자면서 살인적인 수습 4개월 기간을 버텼다.


정확히 2011년 10월 31일에서 11월 1일로 넘어가던 날,

첫 사수였던 회사 선배의 뜻밖의 고백을 받게 됐다.


정말이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사람이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될줄은.




사람들은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OK 한 데는 너도 어느정도 마음이 있었던 거 아니냐"고.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나는 정확히 OK를 한 적이 없다.

2. 그 전에 고백이 상당히 애매(?)했다.


아, 이것부터 얘기해야겠군.


기자문화.


처음 언론사에 입사하면 신입들은 수습 기간을 거친다.

이 기간 동안 수습들에게는 '일진'이 배치된다.

도제식 교육 방식으로 수습 한명당 사수가 한명씩 붙어서

취재 지시와 기사교육을 한다.


이때 일진은 100년은 굶주린 하이에나 같다.

사실 취지는 나쁘지 않다. 다 이유는 있다.


기자는 항상 '마감'에 쫓기기에,

시간 엄수가 가장 기본인만큼 어쩔 수 없이 항상 긴장해야 하는 직업이다.


이 긴장이 풀어져서 데드라인을 놓치면

방송 사고가 나고 지면이 비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는 곧 언론사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진다.


언론사에 입사하게 되면 수습들은 큰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고생 끝 언론고시를 통과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들뜨겠는가. 기자 명함이 나오는 순간 자기가 마치 뭐라도 된 듯(물론 모두가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허세를 부리거나 자만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습 기자는 그저, 기자라는 시험을 통과했을뿐,

냉정하고 험한 이 사회의 맛을 전혀 모르는 상태다.


수습 교육은 소위 이런 겉멋, 물빼는 과정이다.

래서 아주 철저히, 기필코, 결단코, 인간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다.


수습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너넨 인간이 아니야"였다.


수습은 배우는 기간이다. 처음부터 잘할 리가 없다. 그땐 엉망진창 실수투성이었다.

가뜩이나 모르는 거 투성인데 잠도 못자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하루종일 시달리니,

머리는 점점 더 굳어지고 바보가 돼가는 듯 했다.


이렇게 실수할 때마다 정말 고성과 함께 적지않은 온갖.. 욕(?) 등등으로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했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진 편이라고 한다.

내가 입사했을 때도 선배들은 그랬다. "요즘 수습들은 꿀"이라고.

자기들은 선배들한테 몽둥이로 맞고 기합받고 쌍욕 듣는 게 일상이었다고.


그래서, "때리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할 건 아니지 않은가.

낮은 자세로, 겸손을 가르쳐야하는 건 맞지만

이런 방식이 반드시 옳다고는 볼 수 없다.


얘기가 잠시 샜다.

그랬다. 내 첫 사수이자 지금 한 침대에서 함께 잠들고 눈뜨는 이 남자도 내게 그랬다.


신랑은 키도 크고 목소리도 크다. 발성은 쓸데없이 좋아서

버럭하면 정말 머리카락이 삐쭉 설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한다.

내 신랑이 처음 나를 쥐잡듯이 갈굴때,

"진짜 저사람 애인은 불쌍하다. ㅉㅉ..저런 남자랑 어떻게 사귈까?" 했는데


그게 내가 됐다.

(물론 지금은 판세가 뒤바뀌었지만)


대학 시절, CC들이 열렬히 사랑하다 헤어지고 나면

온갖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는 것을 보고

절대 한 학교든, 학과든, 동아리든, 한 울타리 안에서는

'커플이 되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한 나였거늘,


결혼 적령기가 다가올 무렵,

하필이면 사내 커플이 될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사람 인생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다시, 애매한 고백을 하던 2011년 10월 31일 밤으로 거슬러가자면,


그가 갑자기 나를 집 앞이라면서 나오라고 했다. (이때 미투 열풍이 불었다면..??ㅎㅎ)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는 맛있기로 소문난 커피숍이 있었는데,

자기는 "커피를 좋아한다"면서

"지금 커피 마시러 왔는데 할 일 없으면 커피 사주겠다"며 종종 부르곤 했다.

(신랑이 커피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지금도 원두를 직접 골라 사다가 내려마실 만큼 좋아한다.)


신랑은 지금도 우긴다. 그게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고.

그런데 수습 갓 뗀 신입 입장에선, 특히 '상명하복' 문화가 철저한 이 곳에서

'거역'이란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잘못한 게 있는데 이게 다들 있는 회사에서 말하긴 그렇고

따로 불러내서 훈계하려는 건가 싶었다.


무엇보다, 후배를 '여자'로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정말정말정말정말 정말정말정말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무서운 선배였다.


정작 만나서는 별 말이 없었던 것 같다. 나오라해서 나갔던 기억은 나는데

커피 마시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만큼, 무서워서 나가긴 했지만, 당시 나로서는

전혀 의미부여가 되지 않던 만남이었다.


그렇게 두번인가 세번인가 커피를 마시고

10월 31일 저녁이 됐다.


9시쯤인가 연락이 와서 저녁 먹었냐고 물어보더니

그날은 맥주를 한 잔 하자는 거다.


그날이 일요일인가 그랬다.

솔직히 좀 그랬다.

"내일 월요일인데 도대체 왜 이시간에 나를 부르는가"


하지만 별 수 있나...;; 뭐, TV보는 것 외에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 티 입고 쭐레쭐레 나갔다.


대뜸 차에 태우더니 맛있는 수제 맥주집이 신촌에 있다면서

거기로 가자는 것이다. 광화문 근처서 살던 중이라 신촌이 그리멀진 않았다.


그리고선, "출출하지 않냐"며.

야식하기 딱 좋은 시간이긴 했다.


신촌 인근 포장마차에서 기계 우동 한 그릇씩 하고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그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좋았다. 내 차림이 상당히 별로였을 뿐.

그런 복장으로 고백을 받고 싶진 않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맥주 두 잔을 시키고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던 것 같다. 그것조차 생각나지 않는 것보니 ..ㅎㅎ


그렇게 정신줄 놓고 있는데,

'훅' 들어왔다.


"내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

'이게 무슨 하늘의 장난인가' 싶었다.


못 들은척 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이미 내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이제 대답을 할 차롄데..아무런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을 곱씹었는데..


좋아하는 것 같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는 것 '같다'는 뭐며,

당신이 던져놓고 향후 계획,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왜 나한테 묻는거니..?

이건 토론하자는 거니 통보하는 거니 뭐니 도대체,

나는 당신이 그저 무서운데 지금 여기서 뭘 어떻게 대답하라는 건가..  


그랬다. 이 새가슴 쫄보 신입사원은 그저

후폭풍이 두려웠다.


내일이면, 당장 몇시간 뒤면, 회사에서 얼굴을 마주해야하는데

거절을 했다간.. 뭐 복수까진 아니겠지만 사수의 호의(?)를 거절한 것에 대한

상응하는 댓가가 따를 것만 같았고..

다 떠나서 그저 '내일'이 두려웠다.


일단 No라는 대답을 하기는 너무너무 무섭고,

내 딴엔 이 짱구를 굴려서 생각한 대답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에요?"..



그러자 싱긋 웃으며

"고맙다"라고 말하는 사수.


널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에요?


이 행간을 "네 좋아요. 근데 우리 사귀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뭐..내가 대답을 이상하게 했으니 이제와 물릴 수도 없고;;;

여기에 대해 뭐라 항변할 말은 없다...

그렇게 입사와 거의 동시에 남친까지 생기고 말았다..


드라마가 대한민국 여성들 다 망쳐놓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좀 ...간질간질 썸타다가 약간 친구처럼, 오빠동생처럼 데이트도 좀 하고..

함께 걷다 서로의 새끼 손가락이 스치면서 자연스레 손잡는..?

그런 로맨틱한 연애를 꿈꿨다.


신랑이 물론 첫사랑은 아니지만,

그런 간질간질하게 싹트는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나의 꿈은 그저 꿈으로 남게 됐다...

 


ㅎㅎ

그래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사수였지만

'내 남자'로서는 정말 '최고의 남자'다.


사내 커플인 게 때론 힘들때도 있었지만,

상황이 힘든 거지 이 남자땜에 힘든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로부터 1년 뒤 프로포즈를 받았고,

상견례 등 약 6개월 간의 준비 끝에

2013년 4월 14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랑이 프로포즈를 하면서 그랬다.

더 빨리 결혼하자고 하고 싶었는데,

내가 "사계절은 겪어봐야 한다"고 했던 말에,

자기가 많이 기다린 끝에 프로포즈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사소한 말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내 뜻도 헤아려주는 그런 배려심이 너무나도 고맙고 참 예뻤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런 말을 한다.

"오빠와 결혼한 건 나로선 도박이었어.
오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결혼했으니까.
그런데 그 도박, 참 잘한 것 같아. 잭팟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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