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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김연지 Oct 01. 2021

기자 11년차 퇴사, 꿈은 추억이 됐다

멋있게 사표 던지려 했는데 눈물만 펑펑


https://youtu.be/o6tenvP3ANQ



회사를 다니다 보면 3년마다 퇴사의 고비가, 혹은 슬럼프가 온다는 말이 있다.

틀렸다.

요즘은 3개월 마다란다.


아..

그것도 아니야?

3일 마다라고.


아.. 3시간마다..?


"아니야 3분마다야"



직장인 누구나 퇴사를 꿈꾼다. 참.. 신기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취업을 원하고서는, 취업만 시켜준다면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하겠다는 그날의 각오는 사회생활을 시작과 함께 하루하루 옅어진다.


기자라는 꿈은 현실이 되면서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언론사는 고용주,

나는 피고용자로 바뀌었다.


언론고시에 번번이 떨어질 땐

'뽑아만 주신다면 월급 안 줘도 괜찮다'는

간절함 뿐이었지만

기자생활 시작과 동시에 '수고했단 말은 됐고,

수당이나 챙겨주슈'라는 태세 전환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






그놈의 '기자 근성'


기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기자란 직업은 일단 체력이 좋아야 한다.


기자라고 하면 다 머리가 좋아야 하는 줄 안다.

물론, 머리 좋은, SKY 출신도 많고 해외 유명대학 석박사도 더러 있다.

물론, 나는 아니다.


10년간 기자생활을 해보니,

머리가 좋으면 당연히 나쁠 건 없겠지만, 머리보다 더 좋아야 하는 것이 체력이다. 그리고 근성이다. 뭐, 근성이 결국 체력이기도 하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야 하니까.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취재환경에서 힘들고 열 받는 상황에서도 욱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일종의 근성이다.


냉철한 판단도 필요하지만 공감 능력도 더없이 중요하다. 감성만 있어도 안되지만, 이성만 있고 감성이 없으면 '기레기'가 된다.


'갑질'하는 기자가 아니고서야, 취재원으로부터 한마디라도 더 끌어내려면 그런 감정노동에 감정노동이 또 없다. 늘 기삿거리가 아쉽고, 팩트 확인, 크로스 체크를 위해서라도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할 수밖에 없기에 본의 아니게 취재원을 귀찮게 할 때가 많다. 진짜 제대로 된 기자라면 갑이 아니라 늘 '을'이다. 한마디라도 더 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그놈의 근성' 때문에 기자의 딜레마도 생긴다. 누구보다 바쁘고 열심히 사는데 돌아보면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허무한 순간이 밀려온다.


기자는 종일 분주하다. 매일 기사 아이템을 발제하고 취재하고 하루하루 기사를 쏟아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쓴 기사는 내일이 되면 그 가치를 잃는다. 뉴스는 말 그대로 새로워야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오늘 쏟아냈는데, 내일 또 쏟아내야 하고, 모레 또 그래야 한다. 계속 그래야 한다. 시지프스의 신화 같다. 기사를 쓰다 보면 내가 사람인가, 기사 자판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론 환경상, 며칠을 취재해 공들여 쓴 기사도 시간이 지나면 밀릴 수밖에 없고, 또 그날그날 사건 사고의 크기, 이슈 중요도에 따라 내가 쓴 기사는 구석에 처박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또 내 의지대로 되는 것들이 아니니까 힘이 쭉 빠진다. 정말 열심히 바쁘게 사는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느낌..


퇴근도 주말도 없다. 사건 사고란 퇴근 시간과 주말을 고려해 터지는 게 아니니까. 휴가를 가더라도 노트북은 필수다. "휴가 가도 기자 근성이 있다면 당연한 것이지" 수화기 넘어 들리는 말에 투덜투덜 노트북을 켜지만 또 할 건 다 한다. 내 이름으로 나가는 기사인만큼 책임감이 생기니까. 근성을 가진 놈이면 당연한 것이고, 난 적어도 머리는 뛰어나진 않아도 근성만큼은 인정받고 싶으니까. 그놈의 근성은 기자 생활을 참 힘들게도 하고, 그 힘든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근원이었다.




'기자'라는 두 글자의 무게. 내가 뭐라고..


그렇다고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다. 지난 10년 4개월이라는 시간을 붙들어준 건, 98%의 힘듦을 상쇄하는 1.98%의 '보람' 때문이다. 나머지는 그 기자로서의 '사명감'이라 하겠다. (흠흠;)


아직도 또렷하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똑같은 옷만 며칠째 입고 다니던 수습 시절이었다.


선배가 시켜 취재원 인터뷰를 하는데 내용보다는 '내 몸에서 냄새는 나지 않을까, 너무 졸리고 힘들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다' 이런 잡생각에 어떻게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그 취재원이 몇 번이고 "기자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허리를 굽신굽신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족히 아버지 나이는 돼 보이시는 분이셨다.


'인터뷰는 했지만 기사화가 될지 안될지는 아직 모른다'고, '저는 이게 일이고 당연한 거다, 인사를 정 하시겠다면 기사가 나간 다음 해주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저 같은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드린다"고 말씀하셨다.


부끄러웠다.'기자'라는 직업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 스스로도 느껴지는 머리 냄새에, 학생티까지 풀풀 나는데도, 손바닥 크기도 안 되는 '기자 명함'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구나. 그렇게 그분은 나의 글에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


나에겐 그분이 앞으로 기자생활을 하게 될 수많은 취재원 중에 한 명이었지만, 그분의 인생에서 나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기자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난 마지막 기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기자를 만날 때, 좋은 일보단 그 반대의 경우가 많으니까)


이후로 만나는 취재원들에게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췄다. 그분들의 목소리가 퍼질 수 있게,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여러 가지 복잡다단한 이유로 기사화가 안된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원망하진 않았다. 어쩌면 약자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 가져 준 것만으로도 위로받은 듯했다. 욕망을 버렸고 욕심을 부렸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한 기자가 되려는 욕망은 버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적어도 좋은 기억으로 남는 기자가 되고픈 욕심이 생겼다.

기자는 말하는 직업이 아니다. 귀담아 잘 듣고 제대로 전하는 직업이다. 정의로운 세상은 기자가 만드는 게 아니었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고, 기자는 그들의 용기에 숟가락을 얹을 뿐이다. 10년 남짓의 기자 생활 동안 상도 여럿 받았지만, 그들의 용기 없이는 결코 받을 수 없는 박수였다. 다시 한번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참 바뀌지 않는 세상,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놈들이 잘못을 저지른 기사를 쓰고, 사각지대에 가려진 약자를 위한 기사를 수없이 썼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있는 놈들이, 배운 놈들이 더하고 나쁜 놈들이 잘 사는 세상이다.


기자는 진실을 파헤치는 직업이라지만, 막상 큰 사건들을 맡게 되다 보면, 기자들이 닿을 수 있는 진실이란 건, 태평양 해변가의 모래알 한 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은 무력감에 빠진다.


가장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언론사이고, 그 누구보다 앞장서 차별금지, 인권존중을 외치지만, 들여다보면 변화를 가장 두려워하고, 공채/비공채, 정규직/비정규직 등 신분에 따른 계급 차별이 뚜렷한 곳이 언론사였다.


슬픈 일이었다. 언론사가 가난하다는 것은. 비즈니스 모델이 없는 채로 사명감만 가지고선 식구들 배를 채울 순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재 환경은 결코 자유롭지만은 않았다.


대한민국 언론사가 모두 그렇다거나 기자가 다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늘 언제 어디서나 악습을 없애고, 부조리를 뿌리 뽑으려는, 또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다만 목소리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오래도록 동력을 싣지는 못했을 뿐.



이별 앞에선 못해준 것만 생각난다더니


10년 4개월. 만 36년의 인생 가운데 1/3을 '기자'로 살았다. 그중 열정 페이도 그저 감사했던 수습 기간 4개월만 빼면, 버겁기도 무거운 명함을 그토록 던져버리고 싶었던 때가 부지기수였다. 울면서 "아 진짜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안 다닌다. 내가 왜 기자가 하고 싶었을까" 과거의 내 꿈에 후회했다.


사표를 들고 회사로 가는 내내, 심장이 꿍꾸덕꿍떡 했다. 창문 밖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지난 10년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매일 밤과 새벽, 생전 안 가던 경찰서를 내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들고, 만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잠든 적도 있고, 억울한 죽음, 안타까운 사고를 수없이 마주하고, 유족들의 울분 터지는 목소리를 멱살 잡힌 채 듣기도 하고.. 산업부에선 또 미래를 바꾸는 기술을 체험해보고 너무나 급변하는 현실에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기술이나 산업 발전의 빛과 어둠을 조명하고... 그러면서 미래에 대해 더 공부하고 변화에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던 지난 10년이었다.

퇴사할 때는 다들 말하듯 '시원 섭섭'할 줄 알았는데 시원하기보단 죄송한 마음, 섭섭한 마음보단 아쉬운 마음이 가슴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부서, 썼지만 나가지 못했던 기사, 끝까지 더 물고 늘어지지 못했던 사건들. 그 이면에는 나 혼자서는 감당 안됐던 여러 가지 이유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럼에도 미련으로 남아있었더라.


나를 모질게 대했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좋은 선후배들이 훨씬 많았다. 따뜻한 순간들이 ㅎ


심장을 누가 꾹꾹 누르는 듯 질근질근하니 명치가 찌르르 울렸다. 눈물이 주렁주렁 맺혔다. 기자 지망생에서 월급쟁이가 되며 회사는 애증 덩어리로 점철됐지만, 이곳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귀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10년간의 '정'은 마지막까지 나를 가장 고민하게 했고, 가장 눈물 나게 했고, 마지막까지 가슴 따뜻하게 했다.


기자.


20대 초반을 바쳤던 간절했던 꿈이었고, 가슴을 뛰게 한 직업이었다. 참 많이 고생했고, 그럼에도 반짝이던 시절이었다. 좀 더 웃지 못하며 힘들게만 보낸 것이 못내 아쉽다. 숨만 쉬어도 이쁜 나이 었을 텐데.


10년 4개월간 쓴 기사들로, 1조 페이지쯤 되는 부조리한 세상을 그래도 옳은 방향으로 1장쯤은 넘긴 것 같단 생각은 든다. 1조 페이지쯤 되는 책이 우리 세대에 넘겨지기 전엔, 그 부조리 책이 100조 페이지쯤 됐었을 테다.


돈도 안 되는 그놈의 '사명감'과 '보람'만으로 현장을 뛰고 펜을 들어준 많은 기자들과 또 용기를 내준 많은 사람들 덕에, 세상은 그래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안전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자를 그만둔 지 벌써 2개월. 지난날의 꿈은 이제 추억이 됐다.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 에서 커리어 제2막을 시작했다.


이직 아니, 전직을 결심한 이유는 세 가지다.


기술 그리고 미래


IT를 출입하면서 기술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정치도 법도 수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세상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키고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이었다. 기술 발전 이면의 많은 문제점들은 그 기술을 악용하고 기술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사람의 문제다. 기술의 변두리에서 머무르지 말고 그 기술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모바일 다음은 모빌리티다. 그중에 자율주행 기술은 미래 산업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도심화, 교통 체증, 고령화, 1인 가구의 증가, 환경오염 등의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책이 자율주행으로 수렴된다. 운전이 힘든 시각장애인, 어르신들의 통원 등 교통약자들의 편의를 돕고, 이동 시간 동안 책을 보거나 업무를 하는 등 생산성 향상 효과도 기대된다.


그럼에도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나 로켓이 될지, 로망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는 스타트업으로 이직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아니면 영영 그 자리에 안주할 것만 같았다. 옮겨도 후회, 옮기지 않아도 후회한다면 옮기고 후회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앉은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없기에. 그리고 이왕 올라탄 만큼, 반드시 로켓이 되도록 힘차게 쏘아 올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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