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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진 Oct 27. 2023

여행 말고 세탁기

  산 지 얼마 안 된 세탁기가 고장났다. 나름 기계를 괴롭히지 않고 사용한다고 자부하기에 당황했고 황당했다. 처음 하루 이틀은 단순한 에러이겠거니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며칠, 몇 주 간격을 두고 몇 번을 다시 돌려도 중간에 멈추기만 했다. 심증이 가는 이유는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달래 가며 써 보려고 애썼다.


  얼마 안 되었다고 해도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이 지났다. 새 것을 산 것은 아니었고 꽤 좋은 제품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그래도 보통 세탁기가 별 이유없이 딱 멈추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건조기도 성능은 좋지는 않다. 그 옆의 냉장고도 마찬가지인데, 이 셋 모두 지들 나름 이유는 있을 것이었다.


  작년에 나는 이 녀석들을 리퍼 상품 중에서 구매했더랬다. 정확한 과정은 모르지만 새 것이지만 반품된 제품들을 리퍼 상품으로 파는 것 아닌가, 어쩌면 판매하는 유통업체가 다를 수도 있겠다. 새 것인데 가격도 싸고 큰 사이즈도 아니어서 공간을 덜 차지했기에 고민하다 선택했다. 새 살림을 대대적으로 마련하는 일도 귀찮고 해서 이사오면서 필요한 몫만 해내면 되지 뭐, 하고 들여놓은 것. 그래서 세탁기도, 건조기도, 그리고 냉장고도 삼성이나 엘지는 아니지만 모두 처음엔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믿어줄 만한 브랜드라고 여겼건만, 1년 만에 녀석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거의 동시에 삐걱거리고 있다. 냉장고야 뭐, 기본 기능만 잘 하면 된다 싶어서 소음이 약간 있어도 감내하며 지냈다. 디지털 시대에도 나는 센서가 많은 최첨단보다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탑재한 아날로그가 좋을 때도 있는데, 자동차의 에어컨이나 냉장고에 대해서는 특히 그런 편이다.  


  건조기는 꽤 단순한 일을 하니 크게 문제는 없다. 그런데 세탁기는 아니다. 어느 날은 탈수까지는 잘 작동되다가 잠깐 동안 에러가 뜨더니 시간이 갈수록 더 빨리 멈췄다. 에러 코드를 검색해서 해결해 보려 했지만 금새 반복되었다. 최근 이 회사가 문제가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알아보니 서비스 받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였다.


  세탁기는 나랑 무슨 원수가 졌길래, 그렇지 않아도 빨래하는 일(빨래를 개는 일)이 귀찮은 나같은 인간을 괴롭히는지, 발은 다쳐서 불편한데 집 안에 있는 이 녀석까지 말을 안 듣는다.


  한 달 넘게 지켜보고 참다가 오늘 드디어 특가로 파는 세탁기를 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내년 상반기쯤 예정하고 얼마 전에 구매해 둔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몇 년을 벼른 휴가였는데, 잘난 세탁기, 네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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