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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진 Nov 23. 2023

총체적 난국, 또는 대폭망

23 NOV23

   망했다, 이번주 금토일 야심 차게 준비했던 나의 모든 계획은 모래성 무너지듯 스르르 내려앉을 모양이다.


   예약해 둔 검진 때문에 이른 시간에 병원에 도착해야 해서 아침부터 분주했다. 여러 가지로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었지만 예약 일정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나는 병원에서 말해 준 준비물도 빠짐없이 잘 챙겼다(마스크만 빼고. 나는 병원에 간 지 하도 오래되어 병원 출입은 계속 마스크 필수라는 것을 생각도 않고 갔다.)  


  담당간호사는 빨리 오라고 어제도 전화를 했었는데, 그 이유가 작성할 서류가 많아서였단다. 내가 미리 서류를 작성해서 갔더니 나름 잘해 왔다며 조금 여유 있다며 좋아했다.


  병원은 너무 복잡했지만 나는 오전 중에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마지막에 예방 접종을 여러 대 맞았다. 그때, 아차, 이번 주말은 바쁜데, 쉴 수가 없는데 하는 생각에 무리했나 싶긴 했다.


   예방 접종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점심때가 지나고 나자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목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갑자기 쉬었으며, 열은 나지 않았지만 잔기침이 시작되었다. 예정보다 조금 서둘러 집으로 오면서 고민했다. 집에 가기 전에 병원에 잠깐 들렀다가 감기약 처방을 받아서 갈까? 아니지, 내일 오전에 여유가 좀 있으니 그때 들러보자, 아니, 약국에만 들렀다 가자, 하고.


  시간을 보니 조금 여유가 있었고 목 따끔거림은 점점 심해지기에 이비인후과에 들렀다가 가기로 했다. 접수를 하고도 한참을 기다렸다. 거의 진료시간 막바지쯤 마주한 의사는 내게 독감검사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독감 환자가 많으니 당연한 수순이겠지 했다. 목 아픈 것은 건조한 곳에 오래 있어서일 수도 있고, 오후 늦게 시작된 미열은 오전에 맞은 예방주사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마음 편하게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내가 느낀 것보다 체온은 높았고, 검사 결과도 양성이 나오고야 말았다. 나는 그때서야 아차 싶었다.


  1. 금요일: 수현이 만나 아이돌 이야기하기

  금요일인 내일은 올해 대학생이 된 수현이를 만나기로 했다. 수현이는 중학생이었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고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 oo 선생님의 딸이다. 나는 이번에 수현이를 만나 캠퍼스 근처에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수현이는 중학생이었을 때, 내게 BTS의 노래들을 '억지로' 듣게 하고, 영어 한국어로 가사를 암기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지금 내가 BTS를 좋아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아이였다. 수현이와 만나면 아이돌 이야기도 하고, 학교 생활은 어떤지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오늘 저녁, 독감에 걸리고 만 것이다.


  2. 토요일: 오래 기다린 모임에 참석하기

  토요일에는 친구 최 oo가 만들어 운영하는 스타트업 모임이 있는 날이다. 최 oo는 아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몇 주 전부터 이동 동선도 계산해 두고 있던 차였다. 내가 할 역할은 사실 거의 없지만, 발표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열정온도가 올라갈 자리였다. 오늘 아침 병원에서 멍하니 대기열에 앉아 있을 때, 마침 그는 진행이 잘 되고 있노라며 토요일에 모두 만나기를 기대한다는 알람을 주었던 차였다.


  3. 일요일 오전: '정우성' 만나러 가기!

  그리고 대망의 일요일에는, 일요일에는, 나는 드디어, 내 생애에 한 번이나 생길까 말까 한 이벤트를 만들 참이었다. 나는 이번 주 일요일, 영화배우 정우성이 무대인사를 온다는 영화관에 당당하게 표 하나를 예매해 두었다. 같이 갈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티켓 오픈을 기다려 가능한 앞자리 쪽으로 한 자리를 예매해 둔 터였다.  


  스타트업 모임이 끝나면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낸 뒤, 일요일 아침에 무대인사를 온 '정우성'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난주와 이번 주 내내, 종횡무진, 내 맘대로 다른 일정을 조율하고 바꿨다.


  4. 일요일, 주말 이벤트의 대미: 친구와 저녁 먹기!

 정우성을 보고 난 후,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리라('정우성 본 이야기도 해 줘야지...'), 머릿속으로는 이미 거의 완벽하고 뿌듯한 주말 일정을 마련해 놓았는데, 조금 전, 독감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야 만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이번 주 수현이와 만나 아이돌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1년을 기다린 스타트업 모임에는, '독감에도 불구하고' 참석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오히려 민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내 평생, 한 번쯤 만날 수 있을까 싶었던 '정우성'과의 눈 맞춤도 못해 보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것은, 지난 8월부터 가을에 만나자고, 10월에, 아니 11월에 만나자고 약속을 정해 둔,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의 즐거운 저녁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번 주가 아니면 연말은 친구가 바쁘니 어쩌면 우리는 또 '내년'이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11월은 왜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실망스러운 달이 되고 마는지. 총체적 난국이다. 나의 야심 찬 이번 기행은 내 몸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부주의함 때문에 대폭망.


  약처방을 받아 들고 약국을 나서면서 11월을 이렇게 보내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잠깐 슬펐다. 반년을 웅크리고만 있다가, 쉬는 날마다 소파 위의 감자가 되어 CSI만 보다가, 드디어 밖으로 나갈 계획을 세운 것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오늘 주사를 맞은 양쪽 팔뚝이 딱딱하고 아프다. 오후 내내 목이 너무 아파서 팔 아픈 줄도 몰랐다.


  안녕, 계획만 화려했던 나의 11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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