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연진 Dec 15. 2023

흐린 구름 너머로

15 DEC23

  긴급한 용무가 생겨 제주에 다녀왔다. 급하게 좌석을 예약했는데, 비행기에 타고나서 생각하니 제주는 무려 10여 년 만이다.


  지난 10여 년 간, 여행이나 휴가가 아니라 잠깐의 출장으로도 제주에 갈 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갔을 때가 떠올랐다. 렌터카를 빌렸지만 일정상 제주 해안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보지도 못하고 돌아왔었다. 그 후에는 일부러 찾을 일이 생겨주질 않았다.


  마침 겨울비가 내리고 있으니, 비행기가 조금은 흔들리겠다 싶었다. 비도 오는데 꼭 가야할까, 괜한 걸음을 하는 것일까, 잠깐 생각했다.


  이륙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공항의 직원들이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이 보였지만 빗물 때문에 시야는 이내 흐려졌다.


  다음 순간 나의 비행기는 비구름을 뚫고 창공을 향해 내달렸다. ‘흐린 안개와 비구름도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앞으로 한걸음 나아갈 수는 있다'라고 했던 의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이 말을 오랫동안 이메일 꼬리말로 써 두었었다.


  그렇게 반쯤 흐린 하늘을 보며 딴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구름 위에 올라 와 있다. 이제 하얀 구름이 반, 그 너머로 파아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땅 위에서 비를 맞으며 우산을 챙겨 들고 공항으로 들어섰는데 몇 분 만에 맑고 파란 하늘을 만나고 있다니.


  우리는 하루하루, 일희일비하며 살아간다. 구름 끼고 비바람 치고 태풍에 우산이 찢기는 것만 같은 괴로운 삶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은빛 기다란 스펙트럼 위에 찍힌 자잘한 흠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동차 강판 위에 점으로 찍힌 틴트처럼 그저 하찮은 것일지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조용하고 경건하고 그리고 덤덤하게 겨울날의 비구름에 대처하는 자세도 필요하리라.


   사실 오늘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몇 달 전 타계하신 스승님의 친구분들을 잠깐 뵙고 왔다. 고등학교 동창이신 그분들이 멀리서 스승님이 살던 집을 찾아와 주셨다. 언제 또 뵐지 알 수 없으니 배웅이라도 해 드리고 싶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오신 어른들께 '저 지금 바로 제주도에 가야 합니다. 바빠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늦으면, 그냥 나는 '오만하게', 제주 쪽에, 늦는다고 기별을 할 참이었다.

  모두가 바빠지는 연말이지만, 아무 이해관계없이, 그리운 친구를 보러 와 주시는 어른들의 마음, 그 마음이 나의 사소한 제주행 용건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오늘 아침 나의 뇌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 같다, 아주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스승의 친구분들은 기차를 타실 예정이어서 나는 역으로 먼저 갔다가 바로 공항으로 날아야 했다. 다행히, 비행기는 탑승이 몇 분 지연되었으므로 늦지는 않았다. 숨가쁘게 자리를 찾아 앉았고 방금 전까지 보았던 흐린 구름 대신, 넓고 파아란 하늘을 보게 된 것이다.  하늘이 정말 파랗고 예뻐서 나는 오늘 아침 나의 착한(!) 선택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0여 년 만에 제주공항을 지나왔는데, 많이 변해 있어서 좀 헤매긴 했다.

손흔드는 공항 직원들ㅡ 비구름 위 맑은 하늘




 

매거진의 이전글 "무럭무럭 자라거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