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은 사라지듯이

[계절의 오행](2023)에 실린 글입니다._오페라의 유령

by 정연진


웅장하고 거친 피아노 선율에 걸음을 멈춘다. 오페라의 유령이다. 나도 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미스 바이엘에겐 어려울 것이다. 아예 생각조차 말자. 바이엘이나 마치고, 캐논 중에서도 아주 간단한 버전이라도 부드럽게 칠 수 있을 때, 그때 학원 선생님에게 아주 정중하게 조심히 여쭤보자.


조금 전에 들은 오페라의 유령이 머릿속을 맴도니 일에 집중이 안 된다. 이 참에 오래간만에 음악으로라도 찾아 듣고 맘을 달래자. 한동안 팬텀 싱어 프로그램에서 인기였던 강형호(이제는 어엿한 가수이다.)의 그 유명한 영상으로 오페라의 유령을 들어두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피아노 학원 선생님에게 문자를 해 두었다. 사실 “학생”은 감히 선생님들에게 요구나 부탁을 해서는 안되는데.. 혹시 모르니까 물어나 보자 싶어서 레슨 가는 전날 아주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남겨보았다.


“선생님, 저도 오페라의 유령 도전할 수 있을까요?

어려우면 패스.”

“네, 가능해요.”

선생님의 답장이 미심쩍었지만 가능하다고 하니 믿어보기로 했다. 웅장하고 무게 있는 오페라의 유령 같은 곡을 내가 할 수 있다니...


다음 날, 학원 선생님이 복사해 준 악보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제 내가 들었던 그 버전이 맞는지 재차 물었으나 맞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연주한 그 버전은, 알고 보니 거의 바이엘 수준의 편곡 버전이었다. 화음으로 오페라와 같은 효과를 내고 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쉬워 보였다. 너무 어려울 것 같다고 포기해 버렸다면 아마 영원히 나는 오페라의 유령의 바이엘 버전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바이엘 수준도 도전할 수 있는 다양한 편곡 음악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갑자기 음악 비즈니스 분야에 일하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덕분에 나도 “연주자”가 되었다. 게다가 악보는 무려 4쪽이나 된다. 폼을 한껏 잡을 수 있으니 이건뭐 초보자가 사기 치기에는 딱이다. 내가 어제 귀로 들었을 때도 분명 오페라의 유령, 그것이었다. 전문가들이 들으면 바로 알겠지만 일반인인 나는 어제 들은 그 악보가 이렇게 쉬운 것일 줄 상상도 못 했다.


두어 번 연습하니, 나도 그때 연주하던 그 초등학생 정도로 치게 되었다. 신기하다. 아, 마지막 부분만 조금 더 테크닉으로 처리하면 되겠다.


마지막은 사라지듯이.


조카 은수 들려줘야지!

사진 c.정연진

2021/ [캐논까지 느릿느릿]/ [계절의 오행](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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