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행](2023)에 실린 글입니다._(인터미션)
내가 연습용으로 쓰고 있는 오래된 피아노는 시인 김기홍 선생님께 받은 것이다. 철근공 시인으로 알려진 김기홍, 바로 그 분이다.
이십 대의 나는 문학도가 아니었고, 오히려 소설가나 작가나 시인은 나와는 다른 결을 가진 인물들로 여겼다. 공학도였던 내가 보기에는 창작자들은 마치 다른 세상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이나 시 쓰기에도 관심이 없어서 나는 그 유명한 작가분들을 솔직히 “비즈니스” 때문에 뵙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 시기에 나는 꽤 많은 분들을 가까이서 뵈었다.
나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팀의 일원이었다. 전문교육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어렵다는 언론 고시 공채 입사도 아닌 비정규직이었다. 그때 만났던 대부분의 연사들, 출연자들은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정치인이거나 작가이거나 전문가이거나 비즈니스맨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직장생활 새내기가 그런 분들을 인터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행인지, 숙련되지 않은 새내기 직장인의 출연 섭외와 원고 요청에, 오히려 인터뷰를 해 주시는 분들이 “알아서” 방송에 걸맞은 내용과 분량으로 기사를 만들어 주셨다. 그 덕분에 방송국에서 몇 년을 버틸 수 있었다.
일로 만난 분들 중에는 이후에 개인적인 인연들로 이어진 관계도 있었다. 김기홍 선생님은 그중 한 분이었다. 꽤 자주 연락하고 지내다가 또 뜸해지기도 하면서 어느새 알고 지낸 시간이 십수 년을 넘겼다.
선생님은 자녀분이 쓰던 피아노를 내 조카에게 주셨고 나도 개인적인 살림(!)과 소장품들을 선생님께 드리기도 했다. 그때 연습용 피아노를 받았던 조카가 훌쩍 커 버린 지금, 선생님은 떠나시고 피아노가 남았다.
올해부터, 아주 천천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연습용 피아노가 필요했다. 피아노 레슨 선생님은 중고 피아노를 구매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겠다고 했는데, 이제 막 기초단계인 데다 집에는 피아노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사진 않았다. 한동안은 피아노 학원에서만 연습하다가 오랜만에 들른 엄마 집에서 먼지를 안고 잠들어있던 그 오래된 피아노를 얼마 전에 발견했다.(하긴, 나는 조카가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볼 때마다, 선생님과의 일들이 간간히 떠올라 아련해진다. 지역에서도, 그리고 문학계에서도 알려진 분이셨기에 평범한 소시민인 나와의 인연, 그리고 이야기들은 이제 나의 시간과 기억에만 남아 있을 것이다.
오래된 피아노 앞에서 선생님의 안부를 여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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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캐논까지 느릿느릿]/ [계절의 오행](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