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프레젠테이션의 비밀>을 읽고
회사에서 투자자 대상 IR 발표를 할 일이 종종 있다. 국문 IR은 대표가 직접 하고, 영문 IR은 내가 담당한다. 감사하게도 첫 IR 발표를 TIPS 프로젝트를 통해 하게 되어서, 실제 데모데이 전에 여러 차례 VC의 멘토링을 받아 많이 고치고 개선시킬 수 있었다. 그때 배웠던 여러 가지 교훈들이 카마인 갈로의 <스티브 잡스 프레젠테이션의 비밀>에 중복되어 나온다. 투자자 대상이든 대중 대상이든, 프레젠테이션의 본질과 성공 공식은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현장에서 받은 피드백들이 이 책에서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은 리뷰가 되었다.
더욱이 이 책은 IR 발표를 넘어서 일반적인 프레젠테이션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을 잘 풀어써놓았다. 실용적인 스킬에 대한 부분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잘하기 위한 본질적인 것들을 우선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300장에 걸친 책에는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분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례와 경험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저자의 주장에 설득력을 높여 준다. 저자는 저자의 의도에 맞게 책을 3막으로 구상했으나, 나는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메시지 중심으로 아래 3가지 포인트를 뽑아 보았다. 1) 열정과 목적의식, 2) 쉽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3) 연습 또 연습.
저자가 이 주제를 가장 먼저 다루었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든다. 앙꼬 없는 찐빵을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 봤자 그 빵이 맛이 있을 리 없다. 마찬가지로 열정과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이 유려한 언변으로 발표를 한다고 해도, 청중이 설득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 발표에서 진정성과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씬에 있으면 여러 기업의 발표를 듣게 된다. 그중에서도 '나는 이 문제를 정말 해결하고 싶어. 꼭 해결하고 말 거야. 끝까지 할 거야.'라는 의지를 가진 발표자는 에너지부터 다른 사람들과 구분된다. 적당히 잘 될 것 같은 아이템을 찾아 창업을 하거나 피봇한 팀에게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바이브가 있다. 그 문제를 꼭 해결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이유와 스토리가 있기에, 절로 귀를 기울이고 지지하게 된다. 그들의 발표를 끝까지 들으면 '저 사람은 어떤 역경이 와도 결국은 해내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투자자도 그런 것을 찾고 있지 않을까? 후기 투자야 명확한 지표로 평가되지만, 초기 투자는 사실 팀과 대표를 믿고 투자하는 것이다. 저 팀은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풀겠다 싶은 확신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정과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반면에 열정과 목적의식 없이 '돈'이라는 목표만을 가지고 창업하거나 아이템을 선정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정말 능력이 출중하고 운이 좋으면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는 팀도 봤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팀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든다. 비슷한 스펙과 기술을 가진 두 팀이 있을 때, 한 팀은 그 문제를 정말 해결하고 싶은 팀이고, 다른 한 팀은 적당히 잘 되는 아이템을 찾아 시장에 진입한 것이라면, 최종적으로 누가 이길까? 결국은 그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어서 시장과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시하는 팀이 선택받지 않을까?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쉽고, 단순하고, 명료한 것을 추구한다. 이를 저자도 똑같이 주장하고, 심지어 스티브 잡스가 이렇게 했다니 정말 반가운 부분이었다. 기술 기반 창업팀이나 전문자격증이 있는 분들은 불필요한 전문용어와 한자어, 영어 남용이 너무 심한 경우가 많다. 변호사들이 쓴 계약서에 내가 모르는 법적 용어들이 아주 장황한 글로 쓰여 있는 것들을 보았을 때 짜증 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 회사에서도 논문에서 주로 쓰이는 기술 용어들이 발표 자료에 툭툭 튀어나오면 '이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여러 번 묻게 되는 비효율을 종종 목격한다.
내가 배움을 게을리하거나 귀찮아서, 멍청해서 요구하는 게 아니다. VC들도 쉽고, 단순하고, 명료한 IR 발표를 선호한다. 실제 VC들이 나에게 주었던 피드백이나 그들이 쓴 가이드를 읽어 보았을 때, 쉽게 쓰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다. 내가 초기에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 용어들로 우리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어필하려 했을 때, 해당 주제를 처음 듣는 VC는 발표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Q&A 시간에 본인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체크하는 질문들만 계속했다. 혹은 회사와 제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질문이 아예 없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VC들은 대개 엄청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도 5분 만에 창업 팀이 몇 년간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물을 같은 깊이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쉽게 설명해야 한다. 한 미국 VC가 나에게 해주었던 피드백 중 인상 깊은 것이 있는데, 발표자료를 검토할 때마다 나에게 되묻는다.
10살짜리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야?
10초 만에 너의 비즈니스를 설명할 수 있어?
연습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 타고난 천재인 스티브 잡스도 프레젠테이션 준비 과정에서는 연습 벌레였다고 한다. 뛰어난 운동선수와 프로들도 연습 없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다. 연습은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온다. 청중을 사로잡는 프레젠테이션을 위해서도 연습이 중요하다.
데모데이에서 스크립트를 보면서 발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미리 짜 놓은 대본을 읽지 않으면 본인의 회사와 제품을 소개하지 못한다니... 그 회사에 대한 신뢰가 바로 깨졌다. 단순한 청중이 볼 때도 이런데, VC라면 오죽할까? 바로 패스하고 자기 할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잠결에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스크립트를 달달 외워서 발표하는 편이다. 그러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으려 신경 쓴다. 그래서 발표하는 도중에 단어나 문장이 스크립트와 다르게 튀어나와도, 정정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한다. 내 입에 가장 잘 붙는 문장 구조와 단어를 찾으려 한다. 글이 아니라 말처럼 들리도록 한다. 숨 쉬듯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연습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티브 잡스의 발표를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활발히 활동하던 인물이라 오래된 영상이 많았는데, 소개되는 제품은 오래된 것들 일지라도 잡스의 발표 방식은 항상 세련됐다. 항상 명쾌했고, 유쾌했고, 놀라웠다. 잡스가 본인의 회사가 만든 제품에 감탄했던 만큼, 그 발표를 듣고 있는 나도 감탄했다. 그와 함께 그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프레젠테이션은 소통이다. 청중과 잘 소통하는 것이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