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되어버리고
너 라고 말하는 순간
너는 네가 되어버리고
우리 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만 되어버린다
나 라고 말할 수 있는 내가 진정 나인지,
너 라고 말할 수 있는 네가 진정 너인지,
우리 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진정 우리인지,
나를 모르는 나는 잘 모르겠다
너를 안다고 확신하는 너는 알겠는지,
혹 우리일 수 있다고 믿는 우리는 어떤지.
실체는 없고 개념만 난무하는 세상
몸부림치는 언어와 요즘의 나.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세계를 논리적으로 그리는 거울이다."라고 정의했다.
즉,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그리는 일종의 그림 즉, 세계의 사실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건데...,
뭐, 매우 설득력 있는 얘기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일 수 있으니까.
내 안에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가 있어야 내 인식과 정서의 세계에서도 같은 것이 세워질 수 있다.
즉, 내 안에 그 언어가 없으면 내 내면의 세계에도 그것이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께름칙하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어떤 것들"에 맞닥뜨리고
그럴 때마다 허공에 시선을 걸고는 멍청한 얼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하나의 명제에 이르게 된다.
제아무리 언어가 절대적이라고 한들, 존재를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는 언어 이전에 흐르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확장하며 통합하지만,
동시에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구분 짓고, 설명하고 제한하면서
우리를 개념의 틀에 가둔다.
존재를 확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가
존재를 규정짓고 제한하고 가두는 것이다.
정의되는 나,
호명되는 너,
그러니 불안한 우리.
정의된 나가 아닌, 살아있는 원형의 나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너라고 호명된 너는 내가 인식한 너일 뿐, 온전한 너를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우리라는 따뜻한 말속에 배제되고 제외된 다른 존재들은 없는지,
연결감이 강렬할수록 고립과 절박함도 강렬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지.
언어 속에 갇힌 듯
존재의 불안으로 몸부림치지만
그럼에도 이 부질없는 짓을 멈추지 않는 것은,
진짜 존재를 찾고 싶은 나의 미련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깨어 있고자 하는 자는 개미 똥만큼 더 많은 것들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근심과 분투도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