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머신 위에서

by 쓱쓱


투. 투. 투

길이 아닌 길

프로그램 5

느려졌다 빨라졌다


걷다가 뛰다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다리가 휘청거린다


무의지와 무계획 속에서

온몸이 휘청거린다


자각할 수 없게 시선을 앞으로

생각할 수 없게 머리는 TV로

프로그램 5가 이끄는 대로

종착지도 없이 밀리는 대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를 움직여

쓰러지지 않기 위해 팔을 흔들어


투. 투. 투

길이 아닌 길

느려졌다 빨라졌다

걷다가 뛰다가

내가 내가 아닌

러닝 머신 위에서





러닝 머신 위에서 달리다 보면

종종


영겹의 시간 속에 갇힌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무한성에 막무가내로 빠져드는 느낌이랄까.


신기한 점은,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지만

정작 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발을 굴리고 다리를 뻗어 걷고 달리지만

내가 밟은 길은 길이 아니다.


분명 감각하였으나, 남아있지 않는 연기처럼

길은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멈추지 못하는 나만 거칠게 덩그러니 남는다.


훈련을 위해 프로그램을 설정하면 상황은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하나도 없는

누군가의 의해 짜인 프로그램에 몸을 맡기다 보면

나 또한 기계처럼 그냥 움직이게 된다.


잠시 정신이 들어

아무리 사정을 봐달라 해도 소용이 없다.

대신 모두에게 공정할 수는 있다.

그게 공정성이 가진 딜레마이긴 하지만.


물론 속도를 조절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조차도 프로그램 안에서 허락된 작은 자유일 뿐.

결국 프로그램에 탑승한 이상 내 의지와 무관한 삶의 속도에 따라야 한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을 테니까.


가끔 용기 있는 자들은 멈출 수 있다.

스탑 버튼을 누르고 러닝 머신 위에서 내려올 수 있다.

숨을 고르고 스스로의 선택에 만족해 할 수 있다.


다만 옆을 두리번거리지 말아야 한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뛰고 있는 모습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닿을 곳이 없다면 과연 우리는 나아가고 있을 걸까?

걷고 뛰는 행위만 있다면 과연 우리는 길 위에 있는 걸까?


투. 투. 투.

위태로운 생존의 리듬 속에 우리의 일상이 있을 수 있다.


혹 지금 우리의 삶이

멈출 수 없기에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멈추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지,

흔들리고 넘어지고 쓰러지지 않으러

하염없이 걷고 또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걷고 달리는 것이 분명 나임에도

스스로를 온전히 감각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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