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by 쓱쓱


여러 겹의 막들을 하나씩 걷어내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뎌

천천히 안으로 향합니다.


그 누군가에 의해 이름 지어졌던 망들이

사각사각 귓가에서 부서집니다.


안으로 더욱 깊숙이 그 본질에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마음의 색들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핏빛처럼 타오르던 붉은색이

몇 번의 부서짐과 걸러짐을 통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색으로 쪼개어집니다.


공기처럼 가볍지만 당나귀처럼 진지하게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눠집니다.


헤쳐지고 난 후 남은 건 오직 하나.


바로 감사.


존재에 대한

당신에 대한

근원적 감사.


감사.






휩싸였던 것 같다.

열망은 시작과 함께 내내 아주 또렷했고

몸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릴 만큼 강렬했다.

핏빛처럼 뜨겁고,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이 본능처럼 달려가는 힘이 있었다.

도무지 말릴 틈을 주지 않았다.

분명 의지를 넘어선 차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곳엔 엉킬 대로 엉킨 내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후 나는 사라지고 있던 그 열기와

내 안에 남아 잔열 하는 열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싶어
스스로를 향해 겹겹이 쌓인 막들을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막을 하나씩 벗길 때마다 사각사각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사랑이야”, “이건 집착이지”, “너는 원래 이런 걸 원했잖아”

무수히 많은 규정들과 문장들이 바스러지는 소리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많은 규정들과 문장은 다 어디서 온 걸까..?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열망은 정말 내 것이었을까...?


그렇게 점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신기하게도 마음의 색이 변해갔다.


처음엔 핏빛처럼 뜨겁고 날카로운 붉음이
부서지고 걸러지며
슬픔과 두려움, 기대와 그리움 같은 여러 색으로 쪼개졌다.


그제야 알았다.
그 열망은 존재를 감싸고 있던 여러 감정이 겹쳐 만들어낸

긴 그림자들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림자를 보는 순간, 그 열망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공기처럼 흩어진 자리에는 결국 진지함이 남았다.


마치 내가 놓아준 만큼,
열망도 제 무게를 다시 찾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열망으로 감춰졌던 존재가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것이 흩어지고 남은 것은 뜻밖에도 ‘감사’였다.


그 대상들이 이 내 안에서 일으킨 흔들림들은
결국 나를 더 깊은 나에게로 데려와주었다.


처음의 뜨거운 열망이, 수많은 걸러짐과 해체를 거쳐

집착을 벗고 본질만 남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감정.


욕망의 대상이 주었던 상처와 기대, 희망과 좌절을 모두 지나고 나면

그 대상은 더 이상 갈증의 원천이 아니라

‘내 삶을 움직이게 했던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 이유를 향해 조용히 고개 숙이는 마음.


존재에 대한,

당신에 대한

근원적 감사였다.


덕분에 나는 한 번 더, 나를 통과할 수 있었다.






시는 주술처럼 영을 울리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분명 일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지만

일단 시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곧바로 영혼을 소환할 수 있다.


물론 웬만한 에너지로는 어림없다.

소환술에는 생명 정도는 받쳐져야 하니까.


그래서 시는 강렬한 감정과 순간적인 느낌이 폭발할 때 아주 조금 써진다.

이를 위해 가진 에너지가 미친 듯이 응축되어 터져야 하고

이후의 고양된 마음이 극강 하는 기분을 견뎌야 한다.

그러니 정녕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래전에 써 놓았던 시들을 다시 읽으며

그 시절 폭발했던 나의 감정들과 마음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보냈다.


뜨거우면서도 서늘한 시간들이었고

단어와 문장 속에 새겨진 순간순간의 내가

너무나 또렷하고 선명해 종종 민망함과 닭살이 돋았다.


마음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던 탓에

시의 법칙도 문법도 정석도 없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식 쓰적임이었지만,

그래서 그냥 시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었고

그래서 편안하게 이곳에 남길 수 있었다.


적어 놓았던 시를 다시 이곳에 옮겨적으며

시를 썼을 때의 나와 쓴 시를 읽는 지금의 내가 조우했고

덕분에 과거의 나를 다시 읽고

지금의 나를 다시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글쓰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며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30개의 시 안에 담긴

무수히 많은 생각과 감정과 느낌들을 생생히 살아내며

다시 찾아낸 것은

결국 하나.


감사였다.


나를 향한,

세상을 향한

사랑하는 모든 대상을 향한

근원적 감사.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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