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텔레비전은 거실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안방으로 옮겨졌고, 문은 잠겼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오빠와 나는 항상 둘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잠긴 문 앞에서 내가 처음으로 배운 것은 결핍이 아니라 심심함이라는 이름의 다른 무언가였다.
심심함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심심함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일종의 내부 압력 같은 것이다.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해 나는 결국 책장 앞에 서게 되었다.
처음엔 만화책이었다.
그다음엔 소설이었다.
글자들이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가 감각이 되고, 감각이 어느 순간 삶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찌릿하다는 표현이 있다.
전기가 통하듯 짧고 강렬하게 무언가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
책을 읽다가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곤 했다.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음 속에서 방금 읽은 문장이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럴 때면 가슴이 조금 부푸는 것 같기도 했다.
요즘은 활자가 너무 많다.
스마트폰 화면을 열면 읽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쏟아진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홍수 속으로 들어가고,
눈을 감기 직전까지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읽는다기보다는 휩쓸린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물살이 강할 때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방향을 잃듯,
글이 너무 많으면 우리의 뇌는 전략을 바꾼다.
살아남기 위해, 다 읽는 척을 시작하는 것이다.
건성건성 읽기. 훑어보기. 스캔하기.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을 처리하게 되었다.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고 분류하는 것이다.
이건 중요해, 이건 나중에, 이건 안 봐도 돼.
그렇게 우리는 매우 효율적인 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효율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조용히 가져갔다.
습관은 자신이 습관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는다.
건성건성 읽기가 습관이 되면,
어느 순간 깊은 글 앞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때의 기분은 묘하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모르는,
그 묘한 불안.
그것은 아마도 집중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는 것이리라.
집중이란 무엇인가.
글자 앞에 잠시 멈추는 것이다.
이해하려는 것이다.
내 안의 무언가와 글 안의 무언가가 만나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건성건성 읽기는 그 만남을 계속해서 미룬다.
다음 글로, 다음 영상으로, 다음 알림으로.
결국 아무것과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하루가 간다.
가장 두려운 것은 따로 있다.
읽기가 건성건성이 되면,
생각도 건성건성이 된다는 것.
그리고 생각이 건성건성이 되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건성건성이 될 것 같다는 것.
상대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 말의 결론을 먼저 예측하는 것,
상황의 맥락을 읽기보다 표면만 훑고 판단해 버리는 것.
그것은 결국 글을 건성건성 읽는 것과 같은 구조다.
중요한 것은 건너뛰고, 감각적으로 자극적인 것만 잠깐 머물다 지나치는 것.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많은 것을 보게 되지만,
어느 것 하나도 깊이 경험하지 못한 채 나이를 먹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라고, 어떤 심리학자가 썼다.
새로운 경험이 없으면 뇌는 기억할 것이 없고,
기억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건성건성 읽은 것들은 기억에 새겨지지 않는다.
나는 가끔 그 잠긴 안방 문 앞으로 돌아간다.
심심했던 오후,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없음과 온전히 마주 앉을 수 있었던 그 시간으로.
책장에서 꺼낸 낡은 소설 한 권,
누군가의 삶이 활자로 빼곡하게 들어찬 그 페이지들 앞에서,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스크롤을 내리지 않았다.
다음 것을 찾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그리고 글자들이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찌릿하다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집중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지금 나는 그것을 다시 배우려 한다.
느리게 읽는 것을.
한 문장 앞에서 멈추는 것을.
건성건성이 아니라, 제대로.
심심해서 책을 읽던 아이처럼,
이번엔 선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