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와 단상_매(일)뭐(라도)쓰(기) 프로젝트_7월_17일차
어렸을 때 부모님은 집안 식구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으면 어김없이 나와 오빠에게 노래를 시켰다.
명절이나 중요한 날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이 식사를 다 마칠 무렵이면 예정된 수순처럼 우리의 무대가 준비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그 당시 전축과 다량의 LP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주말에는 아침저녁 그 시절 노랫소리가 집안에 가득했다. 이미자와 혜은이를 지나 이은하와 최진희의 노래들은 엄마의 애창곡이었고 배호의 ‘장충단 공원’은 아빠의 18번이었다.
선곡의 초이스가 없던 어린 우리는 그렇게 늘 부모님이 즐겨 듣던 그 시절 가요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말을 곧잘 하게 될 무렵부터 우리는 어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유치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인생 5년 차가 부르는 ‘사랑의 미로’에 열광했다.
특히 나는 여성 보컬의 노래에 강했는데,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든 채, 마지막 노랫말의 끝은 꼭 긴 떨림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이런 압도적인(?) 스킬 때문에 부모님은 어느 모임을 가든 나의 공연 무대를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어릴 적 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무척 예민한 아이였고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불편한 성향의 아이였던 것 같다. 감정의 기복도 있었고 어떤 일들은 쉽게 잊히지 않아 끙끙대던 기억도 있다. 어쩌면 그런 나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불편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런 나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셨던 건 아닐까.
물론 음주가무의 DNA가 뿌리 깊은 우리 민족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해도 나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칭찬과 인정을 받았고 관심과 호의를 느낄 수 있었으며 스스로 뿌듯함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첫 시작의 떨림은 반복될수록 간격이 짧아졌고 점차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는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노래를 활용한 부모님의 빅픽쳐는 매우 탁월했던 것 같다.
가끔 그 시절 노래를 흥얼거리면 아랫배가 따뜻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