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단어와 단상_매(일)뭐(라도)쓰(기) 프로젝트_7월_27일차

by 쓱쓱

얼마 전 소설을 읽다가 마음에 밑줄을 긋는 글을 발견했다.


참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 ‘진주의 결말’에 나오는 진주의 대사였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감과 이해가 가장 큰 화두인 일을 하면서 나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그냥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스스로를 잘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니 결국 누가 누구를 다 이해한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되기 어려운 구조일지도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어떻게 알겠느냐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만이라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우리가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그 불가능에 가까운 그 일은 그가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나조차도 가끔은 두려운 내 마음의 길을 따라 깊이 들어가 보려는 용기를 그가 보여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란 내용의 명확성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관심과 집중이며, 순수한 노력의 정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사실 이해의 작업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함께 따라가며 가능한 같은 수준에 머무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지난한 여정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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