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Dec 22. 2019

14. 산 너머 산


12월 19일 목


어제는 여러 가지 검사가 있었고, 오늘도 뇌파검사가 있다는 병원 일정이 가족 톡방에 올라왔다. 가족 중 한 명이 경관 식이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연락도 왔다고 했다. 셋째가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면서 교육을 받고 있다는 내용도 올라왔다. 신경과 협진이 있다는데 담당의사 명단만 올라오고, 병실 회진은 수술 집도한 소화기외과 의사만 다녀갔다고 한다. 


하루 종일 업무가 있고 저녁에도 오래전 약속한 모임이 있는 날이다. 딱히 달라질 게 없다면 모임에서 밥만 먹고 나와서 저녁 면회시간에 가면 되겠다 싶었다. 몇 년 전에 업종변경 한 사람들이 친목 겸 정보교류차원에서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연령대도 비슷하고 사회경험도 비슷한 사람들이 교육을 함께 받으면서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퇴직한 사람들도 있고 여전히 일하는 사람도 있다. 멤버 중에는 몇 년 전부터 부모님 간병하느라 힘들었던 사람도 있고, 입주 간호사 들여 어머님 간병하는 사람도 있고, 한참 전에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다. 저녁만 먹고 가봐야 한다며 상황을 설명하니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우리 나이 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을 좀 가볍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잠깐이지만..


“암환자로 등록돼서 병원비가 적게 나오니 그나마 다행이야.”

“아버님에 관한 기도 열심히 드릴게요.”

“힘내요. 어머님도 건강 챙기시라고 하세요.”


새로운 일을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이 갖는 동지애 같은 게 있어서 가끔 가족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면 위로를 하곤 했던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내가 그 위로를 받는 당사자였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를 옮길 때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면회시간이라 병동 입구가 활짝 열려있었다. 


아버지 침대가 창가 자리로 옮겨져 있었다. 암병동 입원실은 환자들이 들어왔다가 금방 나가고 그랬다. 며칠 치료받고 나가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 하는 순환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간병인이 창가 쪽으로 자리를 좀 옮겨 보는 게 어떠냐고 하더니 그렇게 주선했나 보다. 아버지는 여전했다. 고개 돌리는 정도가 좀 줄어들긴 했지만, 사람 알아보지 못하고 말 못 하고...


“아버지, 큰딸 왔는데 못 알아보네.”


그래도 소리와 보이는 것에 약간의 반응은 있기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절거렸다. 한순간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는데 초점이 있어 보였다. 작아진 아버지의 희미한 동공을 빨려 들어가듯 바라봤다. 멀어진 의식이 행여나 돌아오려나 싶어서...


머리 쪽 CT 검사와 뇌파검사, 혈액검사, X-ray검사 등이 이루어졌다고 간병인이 설명했다. 호흡, 체온, 혈압은 정상이고 수술 후라 그런지 혈변이 조금씩 있다고 했다. 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얼굴과 몸을 살피고, 간병인에게 하루 일과 물어보고, 간호사실에 들어 상황 설명 듣고 나면 별거한 거 없어도 30분에서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검사를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라는 이성의 충고가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히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다. 오늘도 집에 가면 술 한잔 하겠네 하며 병실을 나왔다.


집에 와서 맥주 한 캔 따고 안주거리를 찾는데 전화가 울렸다.  작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중국에서 살고 있는 지인이다. 긴 통화를 했다. 자신의 상황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심정도 많이 헤아려주는 대화가 이어졌다. 


오늘은 위로를 잔뜩 받는 날이다. 



12월 20일 금 


오전에 막내가 엄마를 모시고 병원 간다고 했다. 간호사로부터 혈액검사 결과 설명을 들었단다. 전해질 불균형이 있음을 알았고, 균형을 찾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고, 균형이 찾아지면 의식도 돌아올 거라고 했다. 수술 직후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다음날부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찾고 있는 중이라 했다. 자꾸 말을 시키고, 자극을 주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집에서 사진을 가져가서 아버지를 보여드리고 말을 걸고 있단다. 


외출을 해서 엄마랑 함께 점심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병원보다는 밖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난번에 엄마랑 갔던 식당에서 보기로 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가족 톡방에 셋째의 글이 올라왔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신경과 검사 결과 간단히 설명 들었음.

1. CT 상의 소두증

2. 뇌파 뇌기능 저하

소두증은 뇌에 물이 차는 거라고 함.

신경과 교수 면담을 원하느냐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스케줄 잡히면 연학 주겠다고 함.


전화상으로 들어서 소두증인지 수두증인지 모르겠음. 검색해보니 수두증인 듯..


 며칠간 당혹스러웠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보는데 엄마랑 막내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다른 종류로 3가지 음식을 시키고, 나누어 먹었다. 셋째가 올린 글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적게 시켰는데도 이상하게 금방 배가 불렀다. 엄마도 지난번보다 많이 드시지를 못했다. 막내가 엄마를 집으로 모셔다 드린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하고 내가 먼저 출발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폐렴 증상으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이 나왔고, 대장암 수술받으러 온 대학병원에서 뇌에 이상을 발견하다니 앞으로 뭐가 더 있을까? 대학병원으로 와서 절제 수술을 하고 경관식이용 콧줄을 차고 하는 게 과연 환자를 위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냥 요양병원으로 모셨어야 했는데 가족들의 끈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


토요일은 담당의 진료가 없고, 월요일에나 면담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주말 내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아닌지 하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12월 21일 토


주말이라 늦게 일어나도 되는데 습관처럼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6시도 안됐다. 다시 잤다. 그리고 꿈을 꿨다. 누군가 절벽에서 떨어지고 들것에 실려가는 모습이었다. 우리 가족이 아닌 유명 연예인이었다. 몇 년 동안 꿈을 안 꿨는데 요새는 왜 이리 자주 꾸나...

심란한 꿈을 꾸는 것을 보니 잠을 깊게 자지 못 하나보다 하며 침대에서 한참을 뭉기적거려도 시간이 9시도 안됐다. 밀린 집안일도 하고, 빨래도 돌리고, 그림 숙제도 하고 모처럼 시간의 여유를 느끼며 한나절을 보냈다.


 오전에 병원에 간 동생과 엄마가 중계방송하듯 아버지의 상황을 전했다. 


어제보다는 조금 눈을 맞춘다. 

어젯밤에 간병인이 팔을 움직이니까 아파 라고 말했단다.

집에 있는 화분 사진 보여주며 보이냐고 물었더니 보여 라고 말함?

손자 사진 보여주고 알아보냐 했더니 눈을 깜박임?


엄마가 문자를 하는데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 물음표가 있어서 무슨 뜻인가 잘 읽어야 하는데 오늘도 여전하셨다. 아버지는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듯한데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오후에 가기로 했다.


 오전에 엄마를 모시고 간 동생이 사진과 이상한 지도 같은 것을 올렸었다.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12층까지 올라가려면 많이 기다려야 하는데 환자용 바코드를 대면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저녁에 엄마를 모시고 병원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며 말을 걸었다.


“빨리 가는 거라며 24번 기둥 옆으로 가야지..”

“난 안 간다. 환자 침구랑 물품 운반하는 건데, 환자가 죽으면 거기를 이용한대.”

“그래서 안 가려고?”

“그런 얘기를 듣고도 어떻게 그걸 타니?”


늘 다니던 대로 한참을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갔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기는 싫으신가 보다. 그 말을 듣고는 나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묘하긴 하다. 한편으로는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가셨으면 하다가도 의식이 없는 상태를 접했을 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감정의 혼재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병실에 가보니 아버지는 고개를 움직이는 것이 줄어들었고, 눈 맞추는 시간도 길어졌다. 큰 딸은 여전히 몰라보고, 말을 걸어봐도 도통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간호사가 와서 혈액검사용 채혈을 한다며 왼손 손등에 주삿바늘을 찌르니, 얼굴을 찡그리며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데 온통 주름 투성이다. 치료적 금식 5주 차가 넘어가니 살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입술을 움직여 아프다고 하는 것 같은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채혈이 끝난 손등을 솜으로 누르면서 살펴보니 손등 전체가 퍼렇게 멍이 들고 피부도 일부 벗겨져 있었다. 손등에서 손목과 팔까지 주삿바늘의 흔적이 많기도 했다. 


 7시 전에 일찍 도착한다고 했던 아들애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 1층 도착했는데 엘리베이터에 바코드를 찍어야 문이 열린다는데... 어떻게 올라가?”

“거기는 직원용이래,  엘리베이터 6대 정도 모여 있는 곳이 있으니 그쪽에서 올라와.”


 하필이면 엄마랑 내가 타고 싶지 않았던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들이 전화를 하고 있다는 게 우연치고는 좀 묘했다. 이상하게 통하는 게 있다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우리 모두 타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유일한 손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검은색 패딩에 까만 백팩을 메고 검은 바지를 입고 나타난 청년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예뻐하던 손자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착잡하면서도 어제보다는 길어진 눈 맞춤에 안도하기도 했다. 수술하기 전에도 손자의 존재는 아버지 머릿속에 없었다. 계산의 영역이 사라지고 관계의 영역도 사라지고 있었는데 의식이 다운된 지금의 상황에서 기대할 것은 없었다. 전해질이 균형을 찾으면 의식도 돌아올 거라는 간호사의 말에 어느 정도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몇 장의 사진을 가져와서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막내 결혼식 사진과 십오 년 전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며 이름도 알려주고 막내딸이라고 설명하는데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잠이 들어버렸다. 몸을 건드리거나 낯선 소리가 나거나 주삿바늘을 찔렀을 때만 예민하게 반응했다. 


엄마 표현에 의하면 자신의 몸을 신줏단지 모시듯 아끼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했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못 해도 몸을 건드리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현저하게 살아있음이다. 비록 사진 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도 숨도 쉬고, 기침도 하고, 얼굴도 찡그리고, 불편하다고 콧줄도 잡아당기고 있지 않은가..





이전 13화 13.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