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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노란 Jan 21. 2021

미니멀리즘 후, 가장 후회한 것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들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올리고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큰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이사를 했고, 20평이었던 집은 40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미니멀리스트에서 그냥 주부가 되었습니다.


처음 미니멀리즘을 할 때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주부가 된 지인들이 '더 예쁜 물건을 사고 싶어서', '집이 너무 좁아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정리정돈을 더 잘하고 싶어서' 등 여러가지 이유로 미니멀리스트가 되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기쁘히도 하면서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을 시작한지 4년 째.

저는 미니멀리즘을 꽤 후회했으니까요.




미니멀리즘을 후회하기 시작한 건 제 직업이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주부였던 제가 글쓰는 작가가 되었거든요. 예전에는 브런치에 글을 써서 에세이 작가가 되면 어떨까 생각했었는데, 그보다 본격적인 장르소설 작가가 되었습니다. 매일 일정 이상의 글을 써야하고, 글을 써서 돈을 벌고, 내일 무슨 글을 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된 뒤 저는 미니멀리즘을 후회했습니다.

텅 비어버린 서재 때문이었습니다. 다 읽은 책,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오래된 잡지, 전공 서적, 강의록, 회의록 등등. 당시에는 다시 펴볼 일 없을 줄 알았던 것들이 무척 간절해졌습니다. 몇몇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도 있었습니다만 전공 서적과 강의록, 회의록, 쓸데 없을 줄 알고 그저 끄적이다 버려버린 노트는 다시 되찾아 올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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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알았는데. 그거 거기다 적어 놨었는데. 이거 강의록에 써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무척 자주 했습니다.

그나마 도서관 출입이 가능할 때는 도서관에서 찾고, 복사하고, 빌려서 볼 수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뒤에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네. 저는 버렸던 책을 다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책이 늘어나니 책장도 다시 사야했습니다.


버렸던 파일철과 노트들이 아쉬워졌습니다. 어떻게든 전자제품을 써보려고 했지만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저는 키보드와 마우스 보다 펜과 종이가 있어야 아이디어가 더 잘 떠오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서를 정리할 파일철을 샀습니다. 노트도 샀습니다. 포스트잇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이건 문구류 쇼핑몰을 운영하는 친구가 종류별로 선물해 주었습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수백, 수천만 원을 버는 직업 특성상 정말 많은 펜과 지류가 필요하게 되었어요.


후회한 건 또 있습니다. 설명서 종류였어요. 설명서는 대부분 스캔 후 버렸는데, 나중에 귀찮아서 몇 가지는 그냥 버렸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설명서를 스캔해놓지 않은 전자제품이 고장이 났더라고요. 설명서를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 남편에게 한 소리 들어야 했어요. "그걸 왜 버렸어?" 설명서에 써 있는대로 조금 만져보면 고쳤을 것을 돈 주고 AS기사님을 불러서 출장비를 드려야했습니다.


버리고서 후회했던 건 대부분 "정보가 담겨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더이상 "정보가 담겨 있는 것과 그것을 보관하는 물건"을 비우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에겐 다른 물건일 거예요. 필요 없어 보였던 파티용품, 시즌 용품 같은 것일 수 있어요. (저는 아이들이 자란 뒤 크리스마스 트리도 다시 샀습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는 건 제 생각보다 정말 중요한 일이더라고요.)




물론 후회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3년, 4년이 흘렀지만 비닐 같은 일회용품들과 도구, 옷을 비워버린 건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른 물건으로 '대체 가능한 물건들'입니다.


오늘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영상을 보았습니다. 다 읽은 책과 쓰지 않는 빈 노트를 모두 버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쓰게 웃었습니다. 저도 처음 미니멀리즘을 시작할 땐 이게 다시 필요해 질 줄 몰랐으니까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여름/겨울을 모두 포함해 서른 벌이 넘지 않는 옷을 입고, 가방은 작은 것과 큰 것 두 개만 사용하고, 빌트인된 수납장에 다 넣을 수 있을 만큼의 이불만 쓰고, 물건을 살 때 세 번 생각하고, 쓰지 않는 장난감을 이웃과 나누지만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책을 삽니다. 일정 정리와 작업을 효율적으로 하는데 필요한 문구류를 사둡니다. 세일할 때 두 개씩 삽니다. 예쁘면 세 개씩 삽니다. 친구들과 나누고 싶으면 똑같은 책을 세 권, 네 권씩 삽니다.


미니멀리즘은 좋은 활동입니다. 과하게 소유하지 않음으로서 주변을 정리하고 소중한 것에 집중하게 해줍니다. 전보다 돈을 덜 쓰게 해주고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비우는 건 재미있습니다. 집이 깨끗해지고 남은 것이 없으면 뿌듯하고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과하게 모든 것을 비울 필요는 없더라고요. 왜 미니멀리즘을 시작했는지, 나에게 미니멀리즘은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고 각자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실천하세요. 누군가가 이건 버려도 다시 쓸 일 없다고 말해도 그대로 믿지 말고 다시 생각하세요. 누군가에도 버린 뒤 다시 볼 일 없는 물건이 내게는 몇 년 후 깊게 후회할 물건일 수도 있어요.


결국 우리 모두 더 행복하고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시작한 미니멀리즘이니까요.


저처럼 후회하는 분이 계시지 않길 바라며.

오랜만에 짧은 글을 써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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