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이어진 나의 바람은 흐릿해진 채 이대로 마저 사는 것이었다. 일을 더 벌이지 않고 관계의 폭도 더 늘리지 않아서 새로운 삶의 계기가 생기지 않길 바랐고, 그로써 잔잔하고 무난하게 살다가 가는 상상을 자주 했다. 인연은 자주 끝났고 새로운 관계는 잘 생기지 않으니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이제 거의 없어 외로울 때가 있지만 지독하게 마음먹을 일은 없어서 좋다. 편하다. 무언가 그르칠 때마다 삶이 끝장난 것처럼 굴던 날도 줄었고. 대학에서 상담학 시간에 들었던 말이 종종 떠오른다.
“진심과 절실함으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오래 버티지 못하더라. 오히려 별생각 없이 계속하는 애들이 상담사가 되더라고. 그렇다고 이런 상담사들이 상담을 못하는 것도 아니야. 공감 능력이 천부적이지 않더라도 꾸준한 공부로 충분히 좋은 상담사가 될 수 있어.”
당시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날들을 살고 있지만, 저 말대로면 이런 삶을 선택해 살 수도 있는 거겠지. 오히려 남은 삶을 조금이라도 만만하게 보낼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다만 생각한 적 없던 새로운 곤란함을 맞닥뜨린 요즘이다. 하고 싶은 것들, 이루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누르고 지내 왔다. 애쓰는 내가 싫었고 꿈꾸다가 좌절될 때마다 지독한 삶을 보내게 될 것이 싫었다. 두렵다기보다 지겨웠다. 나의 과거는 항상 그런 것들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이제 더이상 무언가에 매달려 악착스럽고 싶지 않고 평화를 바라지만 언제부턴가 나의 세계는 자주 간지럽다. 꾸준히 눌러왔던 마음이 밖으로 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어찌할 수 없이 지켜본다. 바라는 것이 생긴다는 게, 삶으로 다시금 뛰어들어서 소중한 것들을 잔뜩 만드는 짓을 더는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다가 지금보다 삶을 생생하게 느끼는 날이 다시금 오고, 또 좌절된다면 그땐 정말로 완전히 끝날 것 같아서.
내가 바라는 삶은 보다 덜 괴롭게 사는 것. 그런데 누르고 눌러 무엇도 더 이루지 않는 평화가 남은 삶을 괴롭게 만든다면 달리 방법도 없지 않은가. 마저 살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건 그대로 멈춰있는 일인데. 살아있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해내야 할 과제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도, 배우고 싶은 것을 용기 내어 배워보는 일도. 경중에 관계없는 저마다의 삶의 당위라는 게 참 아프고 또 경이롭다.
보다 만만한 삶을 위해서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않으면 어느 날로부터 나를 지킬 수는 있겠지만, 나머지 무수한 날들을 지독하게 살게 된다는 걸. 언제까지고 미련을 놓지 못할 거라면 할 수밖에 없다. 나를 위해 자처해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만 너무 절실하게는 말고. 시작한 뒤에 놓지 않는 걸 목표 삼아서 오래오래 가지를 뻗어 나가다 보면 그럴듯한 열매가 생길 거라는, 딱 그 정도의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