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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 Jul 16. 2022

희미해지고부터

영어 못 하는 사람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영어 공부에 관한 책을 빌린 적이 있다. 저자는 한국의 주입식 영어 교육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영어를 머릿속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관적 이해를 통한 공부 방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단계적 방식은 썩 설득력이 있었고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원어민처럼 말을 할 수 있다는 소개도 무척 매력적이어서 나는 책에 적혀 있는 방식을 따라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첫 단계는 영어가 귀에 익을 수 있도록 자주 듣는 훈련이었다. 하나의 테이프를 앞뒤 번갈아 가며 계속 들었다. 몇 달을 반복하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들리는 영어를 한국어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듣게 된 것이다. 가시적인 성취를 이뤘다는 생각에 황홀했지만, 기말고사가 시작되고 듣기 평가가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순간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한국어로 번역한 뒤에 답을 유추하던 기존의 방식을 더는 쓸 수 없게 된 거다. 전보다 듣기 좋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영어는 전처럼 번역되기를 멈추고 하나둘 그 모습 그대로 사라져갔다. 나쁘지 않던 영어 점수가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책의 다음 단계를 통과하거나 기존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둘 중 하나였다. 오래 고민하던 나는 후자를 택했다. 쉽게 사라지면 버릇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인지 이 버릇은 노력까지 했음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무언가 다르지만 애매하게, 결과적으로 영어를 못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요즘 부쩍 그때가 계속 생각이 나는 건 당시의 사건이 나의 현재와 그리 무관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전보다 애썼는데. 노력했는데. 삶을 생생하게 살고 싶어 부단했는데 정신이 드니 지독한 유물론적 회의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루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마주하거나 피어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결국 전부 스러질 텐데. 비릿한 의문은 쉽사리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은 큰 상관이 없었다. 해소할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든 사라지면 그뿐이라고 생각하자 오히려 후련한 마음까지 든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살 이유가 없다고 해서 죽을 당위가 되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좀 더 살아야 했다. 정확히는 나를 아직 살려두고 싶었다. 내가 어둡게 명쾌해진다 해서 가족들이 슬프지 않은 게 아니니까. 내가 잃거나 버린 의미라는 걸 여전히 품에 안고 사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평생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주고 싶지 않았다. 살아야 해. 그러려면 이해해야 한다. 무언가 명쾌해져서 삶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다만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시간이 계속해서 가고 해가 지났다. 지독한 불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바깥의 창백한 하늘을 보고 있자면 지금이 해가 뜨는 중인지, 날이 저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아 가만히 바깥을 응시하고 있으면 날이 오거나, 갔다. 점차 밝아지거나 차츰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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