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수님을 만나서 논문 상담받고 석사 2년 차 입학 후 내게 생긴 학업의 위기들을 이야기하다 할머니 돌아가실 때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울어버렸다. 심리상담받을 때도 나는 감정을 억압하고 있다고 진단을 받았는데 특히 교수님 앞에서는 한국에서도 울어본 적이 없어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더 당황스러울 사람은 M2 논문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박사 연구계획서를 내보이는 타국의 제자를 지도해야 하는 교수님일 것이다. 교수님에게 각오를 내보이고 논문 방향에 대한 조언을 받으니 당시에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머지는 교수님이 정리해 주세요 저는 이렇습니다 하는 마음이었다.
할 말 못 할 말 두서없이 다한 것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긴 하지만 교수님은 콜레주 드 프랑스 도서관 이용 추천 편지를 메일로 보내주시면서 '모든 일에 힘내기를 바랍니다(Je vous souhaite bon courage pour tout)'라고 적어주셨다. 면담 도중에도 나는 용기가 없어서 그동안 못 썼고 못 해냈다고 그래서 오늘 교수님 뵈러 오는데 큰 용기가 필요했다고 너무 많이 말했다. 그래서 격려의 말이 오늘은 내가 용기를 내길 바란다는 말로 들린다. 이번에는 잘 쓰겠습니다. 정말로요.
맨날 와야 하는 라틴 지구에서 우연찮게 도서관에서 친구 둘을 만나 매일 오자고 도원결의를 한 것도 좋았다. 비슷한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다. 장학금을 코앞에 두고 떨어진 사람이 또 있었다 ㅠ 우린 "진짜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그 말의 의미를 우린 이해한다.
나는 교수님을 만나는 용기를 낸 보상으로 스스로 칭찬하는 의미로 녹차딸기라테를 마셨고 파리 가을에 몇 없는 맑고 화창한 날을 기록했다.
친구들 덕분에 끈기 제로인 나는 6시 47분까지 공부했다. 6시 45분에 서둘러 우리를 쫓아내는 사서 덕분에 약간 아쉽게 공부의 흐름이 끊기긴 했다. 그래도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인싸 노숙자 친구 로랑을 또 만나고 동네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로랑은 biocoop 앞에서 4시부터 8시까지 칸트처럼 자리를 지키는데 온 동네 사람들과 친하다. 어제 biocoop 안에서 내가 그린 민화 그림을 자랑했더니 직원들과 손님들이 보고 칭찬해 줬다. 오늘은 자랑하려고 가게에 들어간 게 아니었고 명이나물 페스토를 사려고 들어갔다. 직원이 나보고 중국인이냐고 해서 한국인이라고 했다. 직원이 자기는 어제 그림을 못 봤다고 했다. 또 내 그림 자랑할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집에 들르고 가게에 다시 와서 비단에 그린 민화 화조도를 보여줬다. 그 와중에 내 그림을 덩달아 보는 손님들 중 2명이 나에게 그림을 파냐고 물었다. 평생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림 팔정도로 잘하지 못해서 연습 많이 할 거라고 언젠가는 팔겠죠 하고 말했다. 그리고 민화 아틀리에를 할 테니 이 가게에 홍보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말했다. 신기하게 다들 너무 좋아한다.
우연하게 오늘 좋은 일이 많았던 것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리스에서 온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났고 사람들이 자기를 아리라고 부른다고 했다. 오호. 또 로랑은 동네 노엘 할머니를 소개해주면서 그녀가 캄보디아에서 있던 학살 때문에 부모를 잃고 보트 피플이 된 아이 3명을 입양했다고 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모두 그녀와 눈과 머리색이 다르다. 벌써 3명의 아이가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낳아서 90세의 그녀는 증손주가 있다. 건축가 손자, 25살에게 피앙세 없냐고 독촉하는 보통의 할머니는 로랑에게 물을 사다 주고 과자도 사다 주고 어디서 자냐고 걱정하고 걱정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나는 로랑이 받은 그 과자를 얻어먹는 철부지다. 세상에나 노엘 할머니는 어디 가서 자라고 돈도 20유로도 주고 자기 집에 와서 자라고 말도 꺼내는데 로랑은 지하철에 가서 잔다고 거부했다. 아름다운 천사가 진짜 세상에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 천사를 알게 되고 같이 걸어가는 축복까지 누렸다. 오늘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긴 글을 쓰고 많은 사진을 남긴다.
로랑 외에 디아파노 올리브유 장인 할아버지, Substance 카페에서 따뜻하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맛의 커피를 만드는 요아킴, 그리고 엄마, 나의 제일 친한 친구 도깨비 같은 우리 할머니. 할머니의 영혼은 비행기 탈 필요도 없이 슝 하고 내 곁에 머물러서 늘 말하던 대로 나에게 복을 자꾸 넣어준다. 파리의 삶은 진짜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겨우 살아있는 게 아니라 이 많은 행운을 하루 만에 다 느낄 수 있어서 파리에 있는 게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