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조금 슬퍼진다. 그 시절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이면 더 그렇다. 아무리 애써도 나는 다 이해할 수 없을 그 시절의 슬픔과 실망을 알게 되는 건 무기력해지는 일이다.
오랜만에 내 집에 온 엄마와 대화를 나눈 그날 밤 자꾸 눈물이 났다. 90년대에 태어난 나는 너무 당연하게 누렸던 걸 누구나 쉽게 누릴 수는 없던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집에 피아노가 있어 매일 연습을 할 수 있다거나, 제대로 된 피아노 교육을 받는다거나, 부모가 옆에서 물질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지지를 해준다거나 하는 것들을 쉽게 누릴 수 없던 때의 이야기 말이다. 딸이 많은 그녀의 집에선 여자가 클래식 음악을 잘하게 되는 것은 고급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과도 같았는데 그게 원하는 만큼 잘 되지 않아 그녀는 속상한 날이 많았다. 그래서 딸을 낳는다면 자신이 누리지 못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아들이 많은 서울집에서 자란 아빠에게 음악이나 예술은 그저 미지의 영역이었다. 불안정하고 밥벌이가 힘든 세계라고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었다. 그의 첫째 딸이 예술 중학교를 진학하고 피아노를 전공한다는 건 걱정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아내에게 전적으로 자녀 교육을 맡겼다.
내가 독주회를 하고, 예중, 예고에 진학하고,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것은 어떤 집에서는 엄청난 자랑거리였고, 어떤 집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었다. 그 간극에서 자란 나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내가 아들로 태어났다면 왠지 피아노를 안 치게 됐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우리 집엔 아들이 없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2002년 여름,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가 월드컵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난 몇 년을 목표로 했던 그 중학교에 합격하는 걸 한국팀이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밤늦게도 쓸 수 있는 연습실을 열심히 다녔고, 집에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로도 열심히 연습했고, 멀리 레슨도 열심히 받았던, 참 열심히 산 해였다.
조르는 아이가 아니었던 나는 그랜드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부모님께로부터 그랜드 피아노를 살 거라는 통보를 들었고, 며칠 후 집에 와보니 큰 피아노가 있었고, 더 이상 연습실을 안 가도 돼서 기뻤다. 업라이트와 그랜드는 건반을 누르는 느낌이 너무 달라 집에서 연습할 때면 늘 불안했는데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나를 기쁘게 했다. 부모님은 친할아버지가 이 피아노를 사주셨다 했고, 그 사실은 너무나 의외여서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은 가까운 어른의 자랑이 되지 못하면 쉽게 슬퍼진다. 사소한 걸로도 동네방네 자랑 하는 어른은 아이를 부끄럽게 하지만 극도로 자랑을 절제하는 어른은 아이를 목마르게 한다. 부끄럽기도 하고 목마르기도 했던 나는 방 하나를 꽉 채운 이 거대한 피아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먼 훗날 들은 얘기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돈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마침 그 액수가 그랜드 피아노 가격과 비슷해서 피아노 사주신 샘 치자고 얘기가 됐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의 나에게는 '내가 피아노 치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고 관심도 전혀 없으신 것 같은데 이 비싼걸 예중 준비한다고 사주신'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로 연습해서 가고 싶었던 중학교에 합격했고 몇 년 후 미국으로 이사 갈 때도 배에 싣고 가져왔다. 그 피아노를 산 지 한 15년쯤 됐을 때 그 피아노를 팔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 피아노를 팔고 몇 년 후 나의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뵌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얼마 후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가 그의 자랑인 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제 초등학생이 아니라 자랑이 되지 못하는 일 따위는 별로 슬프지 않다.
15년 동안 그 피아노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학도 갔고 콩쿠르에서 상도 받았고 연주도 준비했다. 나의 열심으로 이룬 것 같은 모든 것들은 사실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과 응원과 기도로 이룬 것들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