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런 성질을 지녔다. 캄캄한 어둠에서 찾고 있는 물건을 단번에 찾을 수 있게 하는 광원(光源)의 성질을. 상처 난 피부를 본래의 살결처럼 부드럽고 고르게 만들어 주는 회복의 성질을. 악몽에서 헤매고 있을 때 조금 더 나은 꿈으로 이끌어주는 선함을. 당신은 그런 능력을 지녔다.
나는 요즘 꿈에서 헤매이고 있다. 분명 부모님께서 나침반까지 켜 놓아준 침대 자리인데도. 하필 그때 나침반이 고장 났던 것인지 이상하게 이사를 오고부터 악몽을 자주 꾼다. 기괴한 인형 탈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납치를 당한다거나 기다리던 차편이 오지 않아 알지도 못하는 거리를 헤맨다거나 엘리베이터에 갇혀 영영 탈출하지 못하는 꿈. 주로 어딘가에 홀로 고립되어 탈출하지 못하는 꿈이다.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했다. 은연중에 바라는 무엇이라든지, 혹은 고통을 주는 일이라든지 말이다. 즉 내가 이러한 꿈을 꾸는 이유에는 지금 나의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유추해 보았다.
눈을 뜨면 모든 게 시시해지는 아침이 찾아온다. 간신히 잠에서 깨어나 준비를 하고 6시 50분, 항상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선다.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또 어떤 업무가 주어질지 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회사에 도착해 있다. 무의식적으로 컴퓨터를 켠다. 업무 정리를 하고 커피를 한잔을 마신다. 이른 아침의 회사는 아직 해가 들지 않아 어둡다. 또 한 번 옅은 삶의 의지가 곤두박질친다. 좁은 우리에 갇혀버린 동물이 된 것만 같다. 일주일에 5일, 8시간 회사에 있다 보니 나라는 사람이 지워지는 것만 같다. 흔적도 없이. 사랑했던 취미와 좋아했던 영화가, 즐겨 듣던 음악과 위로받던 사람들이 나의 일상에서 지워진다. 나의 기억에서도 함께. 그걸 실감할 때면 마음에 돌이 하나씩 떨어진다. 마음을 채우던 깨끗한 물들이 떨어져 버린 돌의 무게만큼 새어 나온다.
요즘 매일 겪는 일이다. 마음에 돌을 하나 둘 떨어트리는 일. 그리고 꾸역꾸역 이미 쏟아진 물을 다시 채워 넣는 일, 삶을 어영부영 버텨내는 일. 이 악몽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내가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 다시 잠에 드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당신이 나의 삶을 사랑한다 말해주었기 때문에. 당신은 간신이 붙들려 있는 나의 삶을 단단히 지탱해 준다. 당신의 해사한 웃음은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아 바닥만 보며 걷던 두려운 겨울에 아지랑이가 피는 더운 여름을 느끼게 해 준다. 당신이 내게 했던 말을 인용하자면, 사랑은 정말 많은 것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있다. 지겨운 일상에도 매일 눈을 뜨는 이유는 내가 보는 세상에 당신이 있기 때문에, 미래가 기대되지 않았던 내가 가까운 내일을 기다리는 이유는 당신과 함께하는 식사가 기대되기 때문에, 곧 다가올 봄이라는 계절에 함께 걷는 거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할 장소에 서 있는 당신의 표정은 어떨지 알고 싶기 때문에.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지울 수 없는 사실만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살게 하는 생(生)의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나는 당신으로 인해 오늘도 이 악몽에서 깨어나 더 나은 날들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