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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서 Oct 24. 2022

사랑의 물성

 그냥 충치가 생긴 줄 알았다. 충치처럼 아프다가도 자꾸 머리가 띵하고 잇몸이 간질거리는 게, 이전에도 겪어본 적 있는 불쾌함이었다. 그래 참 기가 막힌 타이밍에 또 사랑니가 났다. 사실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는데 애써 외면했다. 나만 모른 체하면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작은 사랑은 가지런한 마음을 건드리고 반항하듯 비뚤어진 채 잇몸 한구석에서 조용히 몸을 키웠다. 사랑니의 존재를 깨닫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괜히 혀끝으로 작게 솟아난 치아를 매만져도 보고, 빨리 뽑아내어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가도, 빼어낸 후에는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하면 이내 두려워 포기하곤 했다. 한 번 겪어봐서 다음엔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 호언장담했는데, 오히려 그때의 경험은 나를 더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이 작은 사랑이 이렇게 더 막막한 걸지도 모른다.


 때도 모르고 찾아온 사랑니가 너무 얄미웠다. 내게는 당장 시간도 여유도 없는데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게, 이름만 아름답지 참으로 무용한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멈출 줄도 모르고 자라나는 사랑니는 온전했던 내 입안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고, 방심한 사이 불쑥 찾아와 평안했던 마음을 이리저리 뒤흔들곤 했다. 이 작은 존재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앓게 만드는 걸까. 오랜 시간 앓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참, 어렸을 적에는 사랑니에 대한 바보 같은 로망도 있었는데.” ‘사랑을 알게 될 나이 즈음에 자라나는 이, 첫사랑을 앓듯이 아프다고 하여 사랑니.’ 언젠가 첫사랑을 시작하면 사랑니가 나겠구나. 하지만 이게 웬걸 첫 사랑니가 났을 때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첫 사랑니가 날 때 즈음엔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낭만적인 사랑을 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지독한 짝사랑에 빠져 자존감이나 갉아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찌질하고 한심했던 그 시기를 생각하면 아직도 밤에 잠을 잘 못 이루는데, 생각해 보면 왜 그 애에게 내 사랑니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하다. 사랑니는 나에게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래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소심하게 인정한다. 내 작은 마음에 비하면 사랑이란 말은 조금 거창할지 모르지만, 아주 잠시 그 애를 사랑했었나 보다. 


 헷갈리는 마음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지금 나온 이 사랑니도 방금 떠오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내게 말해주고 있는 걸까? 사랑과 감정에 서투른 20대 초반에만 누릴 수 있는 우리만의 전유물, 오늘부로 내게 남은 네 번의 기회를 다 써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내게 언질을 줄 사랑니가 없는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사랑을 눈치채야 할까. 아,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아프지도 않은데 자꾸 신경 쓰인다는 건, 귀찮지만 자꾸 들여다보고 싶다는 건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니가 알려준 모순적인 사랑의 물성. 허나 아직도 억지로 빼어낸 그 자리가 허하고 욱신거리는데, 나는 언제쯤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밥을 먹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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