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금껏 널 기다리고 있었나 봐

by 연시홍

2021년 2월 3일.

로또를 샀다. 오늘이 우리 생에 가장 운 좋은 날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오빠와 내가 손수 고른 21, 2, 3, 23 같은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로또의 결과는 물론 낙첨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로또는 우리의 가장 운 좋은 날을 기억할 작은 기념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윤이를 만났다.


코로나19가 기승이던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만삭의 몸으로 1월 중순부터 휴직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새로 산 리클라이너 의자에 몸을 누이고, TV를 보며 낄낄대다 책을 읽고 낮잠을 잤다. 가끔 뱃속에서 태동이 느껴졌다. 커다란 물고기가 꼬무락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도망치려는 물고기를 끌어안고 항해하는 어부 같다고 생각했다. 아기는 나에게 가까이 붙어있는 존재였지만,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익숙한 우리 집에 아기가 뿅 등장한 이후 모든 게 어떻게 변할지 아무리 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문득문득 아기를 무사히 만날 수 있을지 불안하고 무섭기도 했다.


수술 하루 전,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나는 오빠와 사이좋게 입원했다. 마지막 만찬은 고민할 것도 없이 버거킹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전 종종 먹던 메뉴다. 역시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기대와 긴장이 공존하는 익숙한 맛이다. 햄버거 하나를 깔끔하게 끝내고 병원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가릴 것 없이 노크와 동시에 병실 문이 열리는 걸 보니 이곳은 병원이 확실했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출산의 순간이 두려워 애초에 제왕절개를 선택했다. 아기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좋은 날짜와 시간도 받았기에 수술 일정은 정해져 있었다. 현대 의학이 허락하는 한, 생명의 탄생에서 불확실한 요소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하지만 수술 시간이 다가올수록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까 안절부절하며 자리에 앉아있기 힘들었다.


종교는 없지만 온갖 기도를 한 덕분인지 다행히 예정대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나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된 것 같았다. 일부러 더 씩씩한 척 수술대 위에 누웠지만, 무거운 배가 명치를 꽉 눌러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곧 손가락에 심박수 기계를 꽂고,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척추 마취를 했다. 하반신에 피가 쫙 쏠리면서 다리가 둥둥 뜬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아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엄마가 무서워해서 윤이도 무서운 거 아니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미 수술은 시작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감각 없는 내 배를 세게 누르고 흔들었다. 뱃속에서 아기가 나오기 싫다는 듯 펄떡거렸다. 그 뒤로 몇 번이고 더 누군가 내 몸을 흔들고, 억지로 배를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는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웠다. 그 순간, 수술실에서 씌워준 헤드폰 소리를 뚫고 ‘응애!!’하는 딕션 좋고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었다. 마취 때문에 아기가 나온 것도 느끼지 못다. 그래서 처음엔 그 울음소리가 옆 수술실에서 난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신생아 울음소리는 ‘으헤’하는 작은 소리라고 본 것 같아서, 저건 신생아 울음소리가 아니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자 그대로 ‘응애!!!’하는 아주 큰 목청의 주인은 바로 우리 딸, 윤이었다. 건강하고 튼튼한 너,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숨을 들이쉰 너. 마취과 선생님이 내 헤드폰을 벗기며 말했다.


“아기가 태어났어요. 곧 보여드릴 거예요.”


눈도 못 뜨고 인상을 잔뜩 쓰며 힘차게 울어대는 아기를 보면서 나는 눈물이 조금 났다. 아기는 너무 작았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소중했다. 내 지나온 시간들이 윤이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 아기를 위해서라면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때, 내가 윤이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빠랑 내가 이 세상에 초대한 게 바로 너였구나. 내 뱃속에서 콩닥거리던 게 바로 너였구나. 만나서 반가워. 우리 가족이 된 걸,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해!’


그렇게 한순간에 나는 엄마가 되었고,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