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없이

에세이

by 참새

어서오세요. 음, 김수연씨? 어쩐 일로 방문하셨죠?

- 자꾸 심장이 뛰어서요. 병원에서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심전도 검사도 받아봤는데 멀쩡하대요. 그 쪽 의사선생님이 정신과에 가보라고 해서 와 봤어요.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상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 그냥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릴 때가 있어요.

그렇군요.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 한 달 된거 같아요.

혹시 특정한 상황에 놓여질 때 그런가요? 예를 들면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나 아니면 무서운 직장상사와 함께 일할 때.

- 아뇨

증상이 발현된 가장 최근이 언제죠?

- 오늘 오전에 심전도 검사 했을 때요

그 전은요?

- 어젯밤 자다 깻을 때 그랬어요

증상이 발현될 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드나요?

- 그냥... 심장이 왜 이렇게 뛰지?

갑자기 쓰러질 것 같다거나 혹은 죽어버릴것 같다거나

- 전혀요. 혹시 큰 병인가하는 생각은 했어요.

가족 중 누가 아프다던가

- 아빠가 간이 안좋으시긴 해요.

남자친구는 있나요?

- 아뇨.

언제 헤어졌습니까?

- 1년 됐어요.

안좋게 헤어졌나요?

- 권태기였어요. 3년 정도 만났고 작은 다툼을 빌미로 헤어졌죠. 그쯤 만나니까 서로 헤어지기만을 기다리게 되더라구요.

글쎄요 오래 사귀셨고, 오히려 좋게 헤어지는 쪽이 더 미련이 남기 마련이거든요. 그게 마지막 연애인가요.

- 한 달 전 쯤? 한 남자를 만나긴 했어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술을 먹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그 남자가 가끔 생각나시나요?

- 전혀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네요.

나쁜 짓을 당했나요?

- 그런게 아니라... 모르겠어요. 근데 보통은 다들 그렇게 만나지 않나요?

다들 그렇죠.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 뿐이에요.
흠... 일...단은... 단순히 건강염려증이거나 가벼운 공황장애정도로 보여집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게 중요해요. 책을 많이 읽어보세요. 시집이나 에세이도 좋고. 글쓰기모임도 한번 참여해보면 좋을 것 같고요.

- 책이고 시집이고 질리도록 봤는 걸요. 글씨가 써진 건 이젠 지긋지긋해요. 선생님, 혹시 안톤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읽어보셨어요?

아뇨.

-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이에요. 마지막엔 바람 핀 남자와 여자가 앞으로의 만남을 어떻게 해나갈지 함께 고민하는 장면에서 끝나는데, 지금 선생님과 제가 딱 그 꼴인 것 같아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요

- 그냥 그렇다구요. 혹시 저 같은 환자들이 많나요?

안그래도 수연씨같은 환자들이 늘어서 걱정이에요. 이유없이 심장이 뛴다거나 이유없이 두통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부쩍 많아졌죠. 심지어 이유없이 자해하시는 분도 있어요.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어떤... 시대정신이 병들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의사인 저로서는 점점 난감해지는 입장입니다

- 모르는 남자와 잔 것도 하나의 증상일 수 있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자각의 문제에요. 그 어떤 존재나 현상이 결코 이유없이 일어나진 않거든요. 저마다의 행성에 중력이 작용하고 서로 간섭하면서 우주가 운행되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도 타인에게 이끌리거나 밀려나면서 자신만의 세계가 구축되는 겁니다. 당신이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을 해야만했던 타당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정신의학은 보고 있습니다. 흠.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치유되기 마련인데 어떻게,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습니까?

- 솔직히 괜히 온 것 같아요. 아무리 봐도 정신질환은 아닌것 같은데... 혈관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일단 처방은 해드릴테니까 자기 전에 한알 씩 드시고 증상이 나타나면 또 드세요. 경과를 지켜보고, 일주일 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 끝났나요?

네 끝났습니다

- 앗, 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살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