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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자신의 글을 바꾸기보다는 미화시킬 타인을 기다리며

by 정연섭

서재에 있는 컴퓨터가 13년 되었다. 저렴하게 구입한 슬림형이며 한번 하드디스크를 교체한 것 외에는 그럭저럭 사용하여 왔다. 30대에는 CPU의 성능이 2년마다 2배 된다는 무어의 법칙을 쫒아 스마트폰 바꾸듯이 교체하곤 했지만 50대에서는 무어의 법칙을 무시했다. '크로의 과학사냥'을 저술하는 등의 문서 작성용이므로 탁월한 성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10년을 버티자 한술 더 떠 디지털 부품의 신뢰성을 알아내겠다는 오기까지 생겼다. 아마 Window 10를 공짜로 바꾸어 준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상술에 현혹되지 않았더라며 아직도 기록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Window 10으로 교체한 후에도 2년 정도 지금까지 잘 버텨 주었다. 17년 마지막 날에 받은 운영시스템 갱신 권고 메시지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패치 후에 스피커에 소리가 나오지 않음을 알았다. 사운드카드 드라이브를 새로 설치해도 벙어리였고, 이전 OS로 복귀시켜도 먹통이었다. 곰곰이 생각하여보니 최근에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마더보의 맛이 가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최근에 마우스가 안 움직인 이유도 머더보드 탓으로 느껴졌다.


문득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의식으로 컴퓨터를 바꾸는 작업이 의미가 있을 듯했다. 해지기 전에 벗은 발로 건너편 LG 베스트샆에 갔는데, 해가 바뀌기 전에 싸게 가져가라고 했다. 함께 간 딸이 인터넷 가격이라고 했다. 더 흥정할 필요도 없이 냉큼 들고 왔다. 필요한 소프트웨어는 이미 깔려 있었다. 옛날과 다르게 방대한 하드디스크를 복사할 필요는 없었다. 사진 파일은 구글 포토에 올라가 있고, 문서 파일은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는 탓이다. 옛날 폴더폰으로 촬영한 저화질 셀카 사진을 투덜거리며 지우고 마지막으로 공인인증서를 옮겼다. 새해를 맞는 의식 치고는 싱겁게 끝나 버렸다.


Y2K의 새해를 노르웨이에서 보냈다. 사실은 Y2K 버그 때문에 비행기를 안 탔다. 덕분에 그해가 기억에 남지만 그 외 신년맞이가 고만 고만했었다.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려도, 계룡산에 일출을 보아도, 친구들이 동해의 일출 장면을 보내줘도 새해를 맞는 감흥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컴퓨터를 교체하면서 색 바랜 사진을 휴지통에 넣으니 추억을 지우고, 새 맘을 품는 느낌이 팍 왔다.


송구영신의 의식을 이어가기 위해 2000년도에 구축한 홈페이지마저 블로그에 옮기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블로그가 활성화되지 않고 인터넷 도메인을 사놓으면 돈이 된다는 시절이었다. 제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홍보도 할 겸 홈페이지를 구축하였다. 덤으로 노르웨이에서의 생활, 유럽 여행, 과학기술의 사소한 이야기도 함께 올렸다. 전문 회사의 웹호스팅 서비스를 받았기 때문에 2년마다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계약 연장할 때마다 공짜 블로그로 옮기려다 하루를 꼬박 셀 듯하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새 컴퓨터가 온 김에, 송구영신의 의식으로 이번에 일을 치르기로 했다.


17년 전 글들이다. 그 당시에는 자랑스럽게 올렸던 글인데 지금 와서 보니 가다듬고 싶은 문장이 수두룩하였다. 사람의 향기가 난다고 칭찬받았던 내용도 부끄러운 고백만 남아 있었다.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진작 기억나지 않는 장면도 많았다. 블로그로 글을 옮기면서 수정하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참았다. 지금의 나를 위해 젊은 나를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한국 역사학자와 일본 역사학자의 모습이 떠 올랐다. 고마웠다. 부끄러운 글이지만 왜곡하여 해석하여 줄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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