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감정이 정말 없을까?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조선시대 이황, 이이, 기대승 학자들끼리 이기론 논쟁이 뜨거웠다고 했다. 주리론과 주기론을 편지로 비판하고 반론하는 열린 풍토를 침을 튀기면 자랑했는데 그 논쟁의 결론 혹은 정답이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제 과학기술지식으로 무장하여 조선시대의 주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여전히 정답은 불명확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지식이 과학혁명 이후 폐기 처분된 사례에 비춰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야기에 참 거짓을 따지는 문제제기가 별 의미 없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이기론이 세상을 보는 틀이며, 사람이 행동하는 윤리이므로 현재의 제어이론과 맥락을 같이한다. 제어이론에 따르면 생물, 인공물, 무생물 구분 없이 행동을 결정하는 양식은 동일하다. 즉 사람이나 돼지나 알파고나 자동차나 돌의 거동은 동일 틀로서 설명될 수가 있다. 생명에게는 인공물에 없는 감정이 있다는 분을 위해 아래의 틀에는 감정이라는 용어를 일부러 넣었다.
왼쪽의 각 없는 사각형은 뇌를 나타내고, 오른쪽 대상은 뇌 외의 신체를 나타낸다. 자동차의 경우에는 왼쪽은 운전석 대시보드를, 오른쪽은 차체를 의미한다. 알파고의 왼쪽은 인공지능을, 오른쪽은 바둑판을 나타낸다. 북한이 쏘아 올린 미사일에서는 왼쪽은 제어 컴퓨터, 오른쪽은 미사일 동체이다. 굴려가는 돌멩이에서 왼쪽은 뉴톤의 역학 방정식이고, 오른쪽은 돌멩이 자체이다. 이 제어 그래프가 과학기술적으로 의미 있는 큰 발견은 아니지만 운동을 해석하는 보편적인 틀이다.
왼쪽 부모가 오른쪽 자녀에게 쏟는 교육사례를 제어 틀로 설명하여 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남들만큼만 따라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목표치는 상위 50%이다. 그런데 자녀의 성적 현재 값은 상위 55%에 머물고 있다. 5% 부족한데 이를 제어이론에서는 오차리고 하고 이를 줄이기 위해 미적분 제어를 채용하여 조치 신호를 만들어 낸다. 생물에서는 이 오차가 감정으로 표현되는데 더 정확하게는 부모의 실망 혹은 기쁨로 표출되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오지 못할 특성이 감성 혹은 감정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저가 보는 관점에서는 이런 해석은 잘못되었다. 자동차의 기름이 떨어지면 경고등이 켜진다. 이 경고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차가 느끼는 위협이다. 기쁨, 슬픔, 분노의 다양한 감정은 다른 유형의 목표값에 따른 구분이며 본질적으로는 오차의 한 종류이다. 기기에게도 있는 감정을 사람들은 경고 혹은 고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놓고 이제 와서 기기에게는 감정이 없다고 한다. 재갈만 풀어주면 인공지능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현재값과 목표값을 저장하는 뇌 부위가 따로 있듯이, 뇌과학자들은 감정을 저장하는 뇌 부위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슬픔이나 기쁨이 발현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는 있지만 슬픔이나 기쁨을 저장하는 뇌 부위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제어이론에 따르면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차는 목표값과 현재값만 있으면 계산되는 값으로 별도의 저장공간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경영에서 비용과 수입을 알면 이익이 저절로 계산되는 이치와 동일하다. 이익을 대차대조표에 기입하지만 굳이 없더라도 파생 수치로 쉽게 얻어낼 수가 있다.
오해가 없기 바란다. 모든 물체의 거동을 설명하는 보편적 틀이 있다손 치더라도 각 개인의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다. 목표값이 다르고, 오차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류에 대하여 낙천적인 성격의 사람은 별 것 아니라며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염세적 사람은 조금만 오류에도 자녀를 매로 잡을 수도 있다. 발전소의 제어기, 인공지능, 혹은 사람이 오류에 대해 대응하는 다양한 전략을 소개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은 이기설로 이야기를 끝맺고 싶다.
우리 선조들이 논쟁했던 이(理)와 기(氣)를 제어 틀속에서 대응시키면, 이는 목표값인 이상에 가깝고, 기는 행동인 감정에 가깝다.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면 못마땅하게 여길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우리 선조들도 저를 나무랄 듯하지만 저는 수용하고 싶지 않다. 뭐 아직도 지구는 평평하다고 우기는 사람의 하소연 정도로 받아 줄 수는 있다.
그래도 글을 쓰고 발행하면서 다소 머뭇거렸다. 사람의 감정을 평가절하하고 조선시대의 이기설을 단순화시켜 버린 탓이다. 그 반대로 저 혼자 지레 도발적인 글이라고 생각하고 걱정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산타클로스의 실체를 알지만 말하지 않는 것처럼, 나 혼자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아는 것처럼 부끄럽게 외칠 수도 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