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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소설의 경계

넛지 마케팅

by 정연섭

오늘 새벽에 북극 한파가 몰고 온 눈보라로 마당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이웃집 의사 부부는 벌써 앞길의 눈을 치웠지만 우리 집 앞 도로는 눈 이불을 덮은 채 자고 있었다. 대체로 우리 집 앞길은 해가 길고 햇빛이 깊게 들어 조금 게을러도 오후에는 다 녹곤 했다. 이번 강력한 한파에는 녹기 전에 눈이 덧 쌓일 듯하여 귀찮지만 빗자루로 마당을 쓸어 길을 만들었다. 그때 마당에 새겨진 이상한 글씨를 보았다. 처음에는 이웃집 부부가 장난으로 쓴 글씨러니 했지만 오고 간 발자국이 없었다.


5G X Ψ CRO


스마트폰으로 찍은 후에 출근을 하면서 CRO는 교양과학 책의 주인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내내 곰곰이 생각을 해도 더 이상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책에는 크로가 우주로 납치되면서 끝을 맺는데, 그렇다면 크로가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내용일지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5G X'는 '5G 통신을 하지 마'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더 이상 혼자 힘으로는 Ψ가 무슨 의미일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동료들에 사진을 보여주니 Ψ는 세종시 국립도서관의 지붕을 형상화한 듯하다며 세종 도서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친구는 최근에 세종으로 이사를 갔었다. 세종 도서관은 말대로 오목형 지붕을 하고 있었다.


세종 도서관에 단서가 있을 듯하여 오후에는 반차를 내고 세종 국립도서관으로 갔다. 1월 15일까지 연차를 다 소진하라는 권유를 받은 터라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대전에서 세종 가는 BRT도로에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금강을 건너 국무총리 조정실을 지나 도서관에 도착하니 도서관 주자장은 만차였고 도서관 좌석은 꽉 차 있었다. 도서검색 모니터에서 "크로의 과학사냥"을 검색했다. 2층 일반도서 서재로 안내했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남녀 대학생들이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2015년 책은 모두 뽑아낸다고 했다. 내가 찾는 책이 있으니 다른 서재부터 정리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크로의 과학사냥'는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20180110_160113.jpg


얼른 뽑아 책장을 주르륵 넘겨 보았다. 쪽지가 하나가 뚝 떨어졌다. 메모에는 크로와 통신하기 위한 주파수가 적혀 있었다. '크로의 과학사냥'에는 암흑에너지, 암흑물질이 소설처럼 설명되어 있는데, 똑똑한 독자가 쪽지를 만들어 꽂아 두었고, 궁금한 독자들은 이 쪽지로 크로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쪽지를 찢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옆 서재로 갔던 아르바이트 남녀 대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저녁에 4G로 전화하지 마"

차를 몰고 대전으로 오면서 둘은 도서관 알바를 핑계로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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