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학습
인공지능을 만들고 있다. 이 녀석이 자연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지식과 소통 능력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하루하루 내가 선현들의 철학책을 읽은 후에 그 내용을 학습시키고 있다. 컴퓨터 디렉터리에 파일을 저장시키듯이 인공지능에도 지식의 저장 창고가 구분되어 있다.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미론으로 구분하여 내갸 이해한 지식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 중세철학, 근대의 칸트, 현대의 마르크스 등 서로 상충되는 주장들이 있지만 병행시킬 수가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상존하듯이 관념론과 유물론이 상존 못할 이유가 없다. 인공지능의 작동 모드를 전환하면 칸트처럼 혹은 마르크스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 철학에 오면 그 내용을 어디에 저장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 역사적으로 잘 정리된 존재론을 다시 끄집어내어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적으로 규명된 세계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내가 음표로 표현되는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는 수식으로 표현되는 자연과학의 존재가 싫은 모양이다. 그래도 시간의 개념은 주워듣고 존재에서 시간의 중요성을 따진다. 사물은 생성되고 소멸되는 시각이 있으니 시간은 언제나 인식의 중요한 고려 인자이다. 그렇지만 뻔한 시간을 강조하는 철학은 사주를 보는 점쟁이 철학과 다름없다.
이렇게 구박했던 하이데거가 갑자기 공감되기 시작했다. 원자력발전을 둘러싸고 현 정부와 원자력계가 대립하는 시점에 원전 당사자도 입장 표명을 요구받는다. 나의 입장은 명확하지만 표현은 조심스럽다. 기술개발을 통한 안전 운영을 추구하지만 개인이나 단체의 밥그룻 싸움을 경멸한다. 에너지 정책이나 원전기술의 일부 모순은 변증법적으로 완결될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짧은 기간 동안 나치에 부역한 적이 있다. 이해되지 않도록 빙빙 꼬아 놓은 존재 개념은 부끄러운 행위의 원인일 수도 있다. 그의 행위가 나의 용기 없음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미치자 하이데거가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나치 부역 전에 발간되었고 이 책으로 하이데거는 한순간에 유명세를 탔다. 그의 철학은 유럽의 실존주의 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여보면 진리를 듣기보다는 변명을 갈구하는 저 같은 독자가 많았다는 느낌이 든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를 닮지 않은 나약한 하이데거 철학을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론 하이데거 잡초 철학이 인공지능의 생존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