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교육의 중요성
노은 2 지구가 조성될 당시 바로 옆에 방치된 밭 있었다. 얼마 후 그 잡초 밭에 에너지 제로 단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환경파괴라며 불평했었다. 파낸 흙으로 나무는 뽑혔고, 매운 흙으로 소나무가 말라갔다. 재산세에 눈이 먼 유성구청이라며 원망했다. 그러나 지금은 속으로만 삼킨 민원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뽑아내고 말라버린 소나무보다 더 푸른 정원수가 그 단지를 채우고 있다.
우리 집 옆 빈 땅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꽃씨를 가득 뿌렸다. 가을에는 천일홍, 맨드라미, 루드베키아, 추명국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내 휴대폰의 배경 사진이기도 하다. 꽃 밭에 집을 짓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얄미웠지만 지금은 귀한 이웃이 되었다. 우리의 의사결정은 과학보다는 감정에 치우치기 쉽다.
인간의 문명사는 문화와 과학의 진보로 볼 수 있다. 문명의 진보로 인간 수명이 50세에서 80세로 늘어났으며, 가정마다 석빙고를 둘 수 있고,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과학의 기여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듯하므로 문화의 기여만 한 번 따져 보고 싶다.
2000년 전에 쓰인 성경이나 논어는 현재에도 여전히 지혜를 주고, 500년 전에 쓰인 군주론이나 리바이어든도 통찰을 준다. 그리스의 자연과학 지식은 땅속에 묻혔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지혜는 여전히 땅 위를 활보하고 있다. 과학은 어머니를 죽이면서 생존하였고 문화는 아버지를 살리면서 지식을 축적하여 온 듯하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면 문화는 진보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퇴보하는 정책을 봐도 그렇다. 물의 신에 씌어 운하를 파고, 하늘 신에 씌어 국정 교과서를 저술하고, 땅의 신에 씌어 원자력 정책을 폐기할 때 문화는 허약하다는 인식을 더 굳혔다.
사실 과학에는 진보만 있고 문화라고 정체만 있을 수는 없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과학 발달로 인한 폐해일 수 있고 인권의 신장은 문화의 혜택일 수 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삼권분립 외에 내가 사회에서 알게 된 헌법재판소는 문화의 진보라고 확신한다. 다만 이런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배경에는 운영 관리, 정보 공개를 뒷받침하는 과학기술이 있음도 상기시키고 싶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밝히는 학문이다. 드넓게 우주를 향해 나아가며, 깊숙이 소립자를 파고든다. 개별 특성을 이해한 후에 무리 특성을 탐구한다. 집착도 이런 집착이 없다. 권력을 잡으면 전임자의 의사결정을 조사하고, 계좌를 조사하고, 통신 기록을 조사한다. 이 또한 집착이다. 아쉬운 점은 대부분 사람이 뒷조사에 열정을 쏟지만 과학적 탐구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데 있다. 과학적 집착에는 보다 정교한 기법을 적용해야 하므로 피곤하고 복수의 카타르시스가 없다.
과거로의 뒷캐기뿐만 아니라 미래로의 의사 결정도 과학적 의사결정이 요구된다. 지구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낮은 우주로 탐사선을 보낼 때 그 예산으로 먹고 마시는 데에 보태라고 불평한다. 좋다, 그렇지만 벗을 몸을 가리고 나면 비단옷을 입고 싶은 맘이 사람의 간사함이 아닌가? 사치를 추구하는 문화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는 과학적 의사결정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다. 수학이나 과학이나 소프트웨어 코딩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자연현상은 꾸밈이 없고 이를 규명하는 과학은 진실일 수밖에 없다. 허리에 실을 매고 바느질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주장은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사람인지라 진실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홍보하고 사실을 왜곡한다. 자신만이 전문가라고 우긴다. 그래도 우리는 과학과 과학교육을 외면할 수 없다. 독단적인 과학자를 피하는 방법에서 기술적 결정은 피인용 횟수를 보고, 사회적 결정은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공론화 위원회처럼 이해관계가 적은 일반인에게 맡기면 된다.
높아진 우리라면 나의 올라감이 신의 은혜 탓으로 돌리지만 과학적 무지로 낮아질 운명을 알지 못한다. 평범한 우리라면 늘어난 30년의 수명을 버티지만 과학기술에 무지하면 치매 상태로 연명한다는 불편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조상이 왕족이라면 과학교육을 권장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노예로 둘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