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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섭 Nov 03. 2018

증발과 응축

경계선을 따라 걷는 길

나는 마지막 남은 연구 보고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주일예배 가기 전까지 몰두하면 보고서 윤곽을 파악할 듯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전등을 켜고 창문을 여는 것도 잊고 여전히 나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잠시라고 느낀 순간 창밖이 다시 밝아졌다. 중대사고 관련 연구인데 보완을 요청할 문장도 눈에 띄었다. 오전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파일을 저장하고 교회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가을 햇볕이 따스한데 마당은 젖어 있었다. 아까 컴컴함은 한바탕 뿌린 가을비 탓이었다. 천둥번개가 칠 거라는 일기예보가 생각났다.



점심으로 김밥을 주문했으니 찾아오라는 아내의 요청으로 차를 끌고 교회로 갔다. 반석천과 은구비 공원에는 색의 향연이었다. 매달린 단풍을 보며 즐거워하다가도, 떨어진 낙엽을 보며 아쉬워했다. 공원 근처 학교 후문에 틈을 삐집고 들어가 차를 세웠다. 이제 막 예배가 끝났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아내는 식당의 위치를 지도로 보여주었다. 영화관 진입로를 따라가는 길만 외웠다. 모임을 위해 집으로 향하는 아내와 반대로 나는 기억한 길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날씨는 화창했다. 식당 주변에서 주차 단속에 걸린 아픔이 있어 차를 두고 걷기로 했다. 등 뒤에서 반갑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니 점심에 우리 집으로 올 가정이었다. 이사 준비하느라 자기 가정으로 초대하지 못했다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 집도 간단한 김밥으로 준비하므로 빨리 오라고 했다.


헤어지고 몇 발자국 떼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로 되돌아가기에는 늦었다. 기억한 식당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그런데 그곳에는 낯선 가게가 버티고 있었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았지만 찾는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은 점점 세졌고 강풍마저 불어 입간판이 넘어졌다. 재킷은 젖었고 머리에서 흘러내린 빗방울이 안경을 적셨다.


할 수없이 스마트폰 지도를 꺼냈다. 식당 이름을 입력하니 바로 근처인데 최적 경로를 빙둘러 표시했다. 도보가 아니라 자동차 모드로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경험적 길 찾기는 실패를 했으니 이번에는 내 경로를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비가 더 세어졌다. 속옷까지 적실 기세였다. 더 냉정하여질 필요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후에 떠나기로 했다. 등 뒤의 노은역을 기준으로 삼고 식당의 방향을 찾았다. 앞쪽이다. 찻길 대신 인도 따라 내려가니 식당 간판이 보였다.



비 맞은 생쥐 꼴로 식당에 들어섰다. 안개 낀 안경 너머로 아주머니 서너 분이 김밥을 말고 있었다. 주문한 김밥을 달라고 했더니 주문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폭풍우를 맞으며 왔는데. 갑자기 짜증이 났다. 지족역에도 동일한 체인점이 있다고 했다. 노은역이 맞다고 대꾸하며  어제 주문했고 전화번호 뒷자리만 불려주면 줄 거라는 아내의 말을 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난감했다.


아내에게 휴대폰으로도, 집전화로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모임 준비로 바쁜 탓이리라. 그 사이 두  손님이  들어와 김밥을 주문했고 한 사람은 가져갔다. 먼저 온 손님은 나인데. 씩씩거리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예약증을 보내라며 꽥 소리를 질렀다. 기다리던 손님도 놀라고 김을 말던 식당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주인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니 그제야 조용하여졌다.


아주머니들은 함께 달려들어 아무 말도 없이 김밥을 말았다. 어묵 끓는 소리만 들렸다. 나도 분을 삭이느라 이마의 빗물을 훔치고 스마트폰을 꺼내 뉴스를 보는 체 했다. 손님 앞에서 괜히 음성을 높였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김밥을 담아주면서 어제 예약표를 분실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문하지 않은 어묵 한 그릇도 덤으로 주었다. 약속의 이행을 원하지 오뎅이 아니라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화해하려는 진실한 맘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실수 하나 때문에 주변 이웃에게 주일 오후를  불쾌하게 할 권리는 내게 없었다. 젓가락까지 넣어 주려는 호의에 큰 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 사이 비는 더 거칠어졌다. 아파트 단지를 따라 넓은 산책로가 펼쳐져있다. 삭막한 상가에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군데군데 심어진 느티나무는 의연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나도 그 사이를 걸으며 함께 가을 풍경이 되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집까지는 짧은 거리라 얼굴의 빗물을 훔치지도 차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 신호등에 멈췄을 때 시계를 보았다. 실랑이 탓에 계획보다 반시간 늦게 가고 있었다. 파란 등이 들어왔다. 가속기를 밟으면서 앞 유리창에 안개가 끼여 앞이 잘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환풍 스위치를 조작하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직관적으로 교통량이 적은 마을길로 방향을 잡았다. 갑자기 차 앞에 경찰관이 나타나 진행을 막았다. 핸들을 좌회전으로 급하게 틀어 큰 도로가에 차를 세웠다. 에어컨을 캐고 습기를 닦았다. 나중에 다시 가보니 자전거도로를 조성하고 있었다.


모임의 주제가 감사였다. 식당에서 보여 준 행동을 회상하며 맘이 찔렀다. 늘 감사하지만 한 번씩 터져 나오는 불평은 무엇인가? 늘 맑다가 한 번씩 찾아오는 천둥번개는 무엇인가? 탁 트인 유리창에 한 번씩 찾아오는 뿌연 증기는 무엇인가? 변화의 계절인 가을에 나는 선택의 경계를 걷고 있는 듯하다. 언제든지 좌나 우의 낭트러지로 떨어질 수가 있다. 느리게 그리고 심호흡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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