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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섭 Nov 17. 2018

국제 표준단위의 재정의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나는 서울에서 석사를 받자 마자 대덕연구단지로 왔는데 고등학교 동문 모임이 자주 있었다. 그때 대전 번화가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양동봉이라는 선배를 만났다. 그는 동문 전체가 덤벼들어도 혼자서 가뿐히 막아낼 정도로 입담이 좋았다. 술값을 잘 내고 농담도 곧 줄 해 인기도 많았다. 여러 개 이빨을 뽑으면 하나는 공짜로 해줄 테니 이빨도 많이 뽑으라는 그의 농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갑자기 잘되는 치과를 그만두고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 선배가 "제로존 이론"을 주장하며 과학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나도 다른 과학자와 비슷하게 돌팔이 과학자가 허풍 친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몇 년 후에 나의 예상대로 잠잠하여졌다.


이번에 세계 과학계가 국제표준 단위를 재정의하는 노력을 보면서 그분의 "제로존 이론"의 철학이 스며들어 있음을 느꼈다. "제로존 이론"은 빛의 속도, 플랑크 상수 등을 "1"로 두는 시도인데 그 이전에도 과학계는 특정 단위를  '1'로 두고  현상을 기술하여 왔다. 가령 천문학자는 빛이 1년 동안 간 거리를 "1"로 두었고, 원자를 다루는 과학자는 보어 반경을 "1"로 두기도 했다. "제로존 이론"이론은 이를 확대한 시도였으니 과학계가 시큰둥하게 여겼다.

                                  

저가 저술한 "크로의 과학사냥"에서도 원주율과 같은 수학적 상수와 빛의 속도와 같은 물리적 상수를 정의한다. 특히 크로는 아내인 네안의 몸무게를 60 Kg으로 정의하는 대범함도 보인다. 물론 일반인에게 과학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소설적 설정이다. 국제표준 단위로서 1Kg은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만든 '국제 킬로그램원기'의 질량으로 정의돼 왔다. 네안은 표준으로 정의된 자신의 몸무게를 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우스광스럽게 서술되지만, 국제 킬로그램원기는 잘 보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년 동안 수십 마이크로그램(㎍) 변했다.


이처럼 물질에 기반한 단위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자연 원리나 수학원리에 근거하여 단위를 정하면 좋다. "제로존 이론"에 해외 과학자들이 관심을 보인 이유도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단위를 정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의 왼쪽은 개정되기 전에 단위 정의 흐름이다. 거리(M), 시간(S)은 빛의 속도나 주파수에서 정의되지만 질량(Kg)은  '국제 킬로그램원기'로부터 정의되었다. 그림의 우편은 개정 후의 단위 정의 흐름인데 질량(Kg)마저도 플랑크 상수(h)로부터 정의된다. 따라서 플랑크 상수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면 질량의 단위 Kg도 변화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과학자들은 플랑크 상수를 측정하여 왔다. 조금씩 정확한 값을 얻었지만 과학자마다 측정값이 달랐다. 그러면 향후에 측정기구가 더 정교하여지면 플랑크 상수도 바뀔 수가 있지 않는가? 당연한 의문이지만 앞으로는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개정된 표준단위를 도입하면서 아래 표와 같이 플랑크 상수를 고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Kg 단위를 고정시킨 후에 플랑크 상수를 측정했다면, 이번에는 플랑크 상수를 고정시키고 Kg 단위를 얻는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생각하여 보자. A와 B가 부자관계에 있을 때 B를 A의 아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A를 B의 아버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 표현의 이해도는 아버지 혹은 아들이 더 유명한지에 달려 있다. 동일한 원리로 플랑크 상수와 Kg에서도 어느 것이 더 변화하지 않는가에 따라 기준을 잡을 수가 있다. 새 개정안에서 플랑크 상수를 고정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과학자들이 판단했다.



새로운 국제표준 단위체계에서는 플랑크 상수뿐만 아니라 아보가드로 수 등 제법 많은 과학적 상수를 고정시켰다. 덕분에 더 이상 이들 상수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고심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과학자에게는 큰 축복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원주율 같은 수학적 상수는 3.141592...이고 소수점 자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무리수인데, 이번에 정의된 과학적 상수는 소수점 자리가 고정된 유리수 상수라는 점이다. 원주율값은 계산으로 도출되지만 플랑크상수는 이제부터 약속된 값이기 때문이다. 또 의문이 인다. 플랑크 상수 6.62607215 대신 그냥 6.6 으로 간단히 정의하지 못했을까? 이는 새로운 정의로 인해 발생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함이다.


동문수가 줄었지만 요즘도 여전히 동문 모임이 지속되고 있는데 한번 나가 봐야겠다. 양선배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대전에 나타날 것만 같다. 이전에 그 뜻을 못 알아봤다며 용서를 구하고 멀쩡한 이빨이라고 내어 놓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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