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에서
작년 여름에는 밭에 뱀이 자주 출몰했었다. 뱀의 실체를 본 적은 없다. 대신 허물은 봤다. 옆지기가 밭에서 이것저것 순치기 할 때나 혹은 지지대를 세우다가 '뱀이다!' 소리치면 나는 놀라서 얼른 농막 안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아직까지 살아 움직이는 뱀을 보지 못한 것이 절대 아쉽거나 하지 않으니 앞으로도 마주칠 일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허물이라고 하니 진귀한 구경에 용기를 냈다. 희끄무레한 것에 일정한 잔무늬도 있는 것 같았고, 원통형의 껍질이 길게 풀숲 사이에, 으으으....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 나는 농막 주변에 백반(명반)을 뿌리며 액이라도 물리치듯이 '저리 가라', '훠이'를 외쳤었다.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개구리 세상이다. 아니 아직은 개구리가 먹이사슬의 제일 꼭대기에 있다. 내가 이것들을 먹지 않는 한. 처음에는 아주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가 겁도 없이 내 주변에서 팔딱거리며 돌아다니더니, 그 귀여운 청개구리는 어디로 가고 초록과 검정의 무늬가 얼룩덜룩 섞인 청개구리의 스무 배는 될 것 같은 크기의 개구리가 풀쩍풀쩍, 나는 깜짝깜짝. 아! 정말 당황스럽다. 그런데 7월이 되니 어디서 이사를 왔는지 자이툰부대 군복을 입은 개구리들이 또 풀쩍댄다. 이건 또 뭐지? 우리 밭에 먹을 것이 많았는지 피둥피둥 살이 쪄서 뛰어 봐야 멀리도 못 가는 살찐 개구리들.
개구리 천국이 된 것은 아마도 밭에 어떤 농약도 뿌리지 않아서인 것 같다. 작년에는 풀도 무섭고 벌레도 무서워 살충제도 뿌리고, 제초제도 뿌렸었다. 옆지기가 그 위험한 약을 뿌리느라 온갖 장비를 갖추고 약통을 등짐 지고 땀을 쏟으며 작업을 했었는데, 그런 노력으로 잘생긴 열매도 얻어먹고, 잡풀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아마 내 몸속엔 중금속이 쌓였을 것이다. 내 먹을 것에 약을 뿌리는 것이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었다.
어쨌든 올해는 무서움과 맞서보려고 했고, 조금 더 너그럽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름 입장을 정했다. 풀은 낫이나 제초기로만 베고, 어느 정도는 방치되다보니 막무가네로 무성해진 풀들이 장맛비를 맞으면서 그야말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풀이 이런 지경이니 벌레와 개구리는 얼마나 살기가 좋았을까? 이쯤 되니 나는 은근히 뱀을 기다려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작년에 뿌린 백반 때문에 못 오나 싶어 후회도 살짝 됐다. 뱀이 나타나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옆집에서 뱀 잡는 약을 원액으로 뿌렸다고 한다. 나의 백반과 액막이 주문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뱀은 정말 못 오겠구나 싶어 다시 한번 실망했다. 그리고 이 원액을 잘도 피해다닌 개구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튼실해 보인다. 내가 자주 가는 중국음식점 옆에 '개구리 연구소'가 있는데, 간판제목과 달리 출입문에는 '진액, 환' 뭐 이런 게 쓰여있다. 왜 갑자기 그곳이 떠올랐지?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기도한다. 추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