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은 또 다른 갈증으로
- 오늘은 짧은 청치마도, 카우보이 부츠도 아니네.
- 그 신발은 옆이 닳아서 버렸어.
-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이곳에 함께 서있다는 걸.
자리에서 일어나 로완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딱 붙는 청바지에 로완의 다리가 닿았다. 정수리를 비비는 턱에서는 까칠하게 깎은 수염이 느껴졌다. 이 땅에서 나를 품어줄 유일한 사람. 지혜롭고 든든한 사람. 지금과 같은 순간을 염원했던 모든 지난날을 되뇌었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는 굳게 다짐했다. 지나간 삼 년의 시간을 말끔히 폐기하겠노라고. 운명이 지시하는 이 모든 격양된 감각들을 만끽해 보겠다고. 보풀 하나 묻지 않은 말끔한 코트 소매 아래로 로완의 금색 털이 보였다.
로완은 커다란 손에 팬지꽃과 블랙튤립을 쥔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보고 싶었어. 너는 여전히 직접 로맨스를 만드는구나. 기다리지 않고.
*
로완을 처음 마주친 건 잔바람이 불던 어느 여름의 해변에서였다. 영문과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한 계절이 지났을 때, 나는 다섯 명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해외연수 지원금에 선정이 됐다. 다수의 대학원생들은 자식을 두고 멀리 떠날 수 없는 그들, ‘엄마’였기에 지원자는 주로 미혼이었다. 연구비 지원을 신청한 자는 겨우 일곱 명이었다. 금액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지원자가 적으니 경쟁이랄 것도 없었다. 셰익스피어와 소로의 문장들을 줄 치며 지새우던 수년의 새벽 속에서 나의 영혼은, 실은, 오직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 몰두해 있을 뿐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소심한 서사들을 건져내 구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소리 내지 못하는 자들의 두 번째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
나는 세상의 힘과 권력에 잡아먹힌 텍스트가 직접 소리를 내도록 그 이야기의 장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모두가 숨을 쉬게 하고 싶었다. 발효된 감정들이 여과 없이 쏟아질 수 있는 하나의 틀, 하나의 장. 내가 만드는 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잠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영화를 내가 멈추지 않고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빚을 내어 출품한 작품들은 잿더미가 되어 돌아왔고, 중고서점에서 데려온 낡아빠진 출품가이드북의 표지는 겨우 남은 자존심을 날카롭게 도려내는 듯했다.
교직이수를 통해 임용고시에 도전해볼까 하는 도피적인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길을 지나가는 학생들 무리를 쳐다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기만 했다. 대학원 강의가 없는 날은 언제나 아트1관 제일 뒷자리에 앉아 개봉하는 독립영화들을 챙겨보기 바빴다. 그렇게 서글픈 질투심과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첫 학기였다. 입시논술 글을 교정하며 벌어둔 쥐꼬리 알바비마저 몽땅 당겨쓴 나는, 벤쿠버행의 비행기에 올랐다.
연구를 명목으로 지냈던 대학교는 벤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가장자리에 있었다. 장미공원을 지나 한참을 걸으면 레크비치의 광활함이 시선을 채웠다. 샌드위치를 품에 안고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을 즐겼다.
무릎을 둥글게 감고 고개를 치켜들면 하늘 한가운데 펄럭이는 캐나다 국기가 보였다. 아침 아홉 시마다 스카프 빌딩이라 불리는 건물에서 철학 강의를 들었다. 실은 독일인 문학교수가 진행하는 문학 비평 강의였는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열렬히 지탄하며, 동시에 후설과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현상학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체계 없는 수업이었다.
오른팔에 고양이 눈동자 문신을 한 게이 친구는 늙은 교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수업 이후 식수대를 지나치며 나는 그들의 관능적인 시선 교환을 못 본 척했다. 그들이 구축해갈 낭만적인 교류를 상상하며 학교를 빠져 나왔다. 여름의 아침은 느닷없이 초겨울 같은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빈티지 가게에 들어가 값싼 겉옷을 사입곤 했다.
오른쪽으로 향하는 14번 버스에서 곯아떨어지면 어느덧 킷실라노 해변에 도착했고, 왼쪽으로 향하는 14번 버스를 타면 다운타운의 중고서점 골목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틈만 나면 비가 내렸고, 금세 옅은 무지개가 생겼다. 사람들은 우비도 우산도 없이 유유히 비를 맞으며 걸었다.
주말 여행객으로 붐비는 그랜빌 아일랜드 마켓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눈이 침침해지는 피로감을 안겨줬다. 근처 수산 시장에서는 짭짤한 생선 냄새가 풍겼다. 백열등 아래에서 과일 가게 주인들은 파란 목장갑을 낀 채 블루베리 한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피부가 까무잡잡한 동양인 여성이었다. 팔에는 힘줄이 곤두서있고, 눈 아래로는 검버섯이 가득한. 수국이 가득한 그랜빌에서 발이 닿는 대로 걷다보니 브레카 베이커리 앞이었다. 버터를 여러 겹 칠해 구워낸 크로와상,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가장 가까운 해변은 일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선셋 비치’였다.
부츠가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을 건너 물을 향해 걸었다. 바다에 가까이 갈수록 병맥주 집단이 늘어났다. 술 냄새, 그리고 젊음과 열정이 일렁이는. 멍하니 빵을 먹을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어 한참을 맴돌았다. 그러다 파도 앞 녹슨 벤치 하나를 발견했다. 검은 배낭을 내려놓고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녁 아홉 시 무렵, 온 세상을 물들이는 늦은 황혼을 바라보니, 눈두덩이가 떨렸다. 목적도, 계획도 없이 도착한 벤쿠버에서의 한 달은 그렇게 마지막 갈피를 향해가고 있었다. 담을 수 없는 장면들을 담아보고자 아등바등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두고, 넌 휴대폰만 보고 있네.
고개를 돌리니 벤치에는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날카로운 코끝을 지니고 있었고, 왼쪽 겨드랑이에는 빨간 보드를 끼고 있었다.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벤치에 앉게 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멋진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한 여자가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어. 그것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정말 멋진 부츠야. 붉은 머리칼은 층이 많이 나 있고. 벤치는 빵과 커피가 널브러져 있어. 처음에는 벤치 뒤로 지나가던 남성이 연인일 거라 생각했어. 잠시 지켜봤는데 둘은 모르는 사람인 것 같더라고. 난 킷실라노 쪽에 사는 캐나다인이야. 퇴근하면 이 시간에 보드를 타. 넌 정말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