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 섬
바람은 새벽부터 내 이름을 불렀다.
섬은 늘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숨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숨이 있었다.
잠깐,
나를 부르는 줄 알았다.
절벽 끝에 서서
바다의 냄새를 맡았다.
짠내와 젖은 흙내 사이로
밤새 식지 않은 쇠 냄새가
아주 미세하게 스며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섬이 나를 안아주다
잠시 멈칫하는 기척이 전해졌다.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궤적을 따라갔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을 켜지 않고
다시 넣었다.
그날,
섬에 커다란 배가 들어왔다.
부두 끝에서
맨발로 물결을 밟았다.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발목을 붙잡는 냉기가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 차가움을
조금 더 밟았다.
기억은
대개 이렇게 시작됐다.
소년이 배에서 내려 말했다.
“물이 생각보다 깊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덧붙였다.
“그냥 바다 같은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여긴 바다가 아니야.”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뭐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경계가 무너질 것 같았다.
경계가 무너지는 쪽이
내 마음이라는 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스쳤다.
이번에는
소금 냄새가 닿지 않았다.
모래 위에
조개껍질로 선을 그었다.
선은 얇았고,
얇을수록 더 또렷해 보였다.
“여기 넘으면 바다야.”
소년은 발끝으로 선을 밟았다.
한 번이 아니라,
일부러 몇 번 더.
“별거 아니네.”
조개껍질이
바람에 뒤집혔다.
나는 손을 뻗었다가
늦게 거뒀다.
뒤집힌 건 조개였는데,
그 순간
섬이 아주 잠깐
숨을 멈춘 것 같았다.
소년의 모자가
물 위로 떨어졌다.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모자를 건네며 말했다.
“이제 우리 친구지?”
말이
물 위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나는 그 미끄러짐을
붙잡지 못했다.
“이름이 뭐야?”
“바람.”
“진짜 이름은?”
“비밀.”
소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웃음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웃음이 끊기는 자리에서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정말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해가 바다에 닿기 직전,
우리는 늘 등대 아래로 갔다.
그때의 바람은
낮보다 조용했고,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소년이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 찍어도 돼?”
“찍어봐.”
셔터 소리가
조금 늦게 도착했다.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화면 속에서
섬은 생각보다 작게 보였다.
작게 보이는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물었다.
“서울에는 무슨 냄새 나?”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스팔트 냄새.
비 오고 나면.”
“좋아?”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숨 쉬기 좀 힘들어.”
그 말이
왜인지 오래 남았다.
숨이 힘든 곳으로
그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등대 불빛이 켜질 때까지
그림자는 하나로 길게 이어졌다.
소년은 그 그림자를 찍었다.
찍히는 건 그림자였는데,
그의 눈은
자꾸 화면을 확인했다.
마치
사라질 것을 먼저 붙잡는 사람처럼.
며칠째 낮게 울리는 바람이
여름의 끝을 알렸다.
소년은 방파제에
가방 하나를 두고 앉아 있었다.
가방 옆에
조개껍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바다로 던졌다.
조개껍질은
짧은소리를 남기고
곧 보이지 않게 가라앉았다.
“진짜 가?”
“응. 방학 끝났으니까.”
“다음에도 와?”
소년은 잠시 바람을 보고 말했다.
“모르겠어.
아빠가 바쁠 거래.”
그 말은
핑계처럼 가벼웠는데,
가볍게 말할수록
더 무거운 것이 남았다.
“도시로 오면 연락해.”
소년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잠시 망설이다가
숫자를 적었다.
종이는
생각보다 얇았다.
그가 그것을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고
잠시 보고만 있었다.
“안 받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잊어질까 봐.”
소년은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우리는
그 종이가
완전히 식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가 기적을 울렸다.
소년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더 크게 흔들었다.
“다음엔 내가 갈게!”
그 말은
파도에 반쯤 잠겼다.
배가 멀어질수록
내 손은 작아졌다.
손이 작아지는 동안
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섬은 예전보다
조금 더 조용해졌다.
그리고 몇 해가 흘렀다.
배가 부두를 떠났다.
나는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섬은 생각보다
빨리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질수록
섬은 더 작아지기보다
더 조용해 보였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섬에서 맡던 냄새였다.
아주 오래 식지 않은 것처럼.
나는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섬을 보았다.
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나는 섬을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올게.”
말은 바람에 흩어졌고,
섬은 그 말을 붙잡지 않았다.
배가 더 멀어졌다.
파도 위에 남은 것은
부서진 햇빛과
늦게 도착한 바람뿐이었다.
잠시 뒤,
섬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배는
천천히,
도시의 불빛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