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서 6장
먼저 찾아온 것은
칼이 아니라
말이었다.
하륜은
호위도,
위세도 없이
윤검 앞에 섰다.
그러나 그의 자세에는
이미
끝까지 가 본 사람의
계산이 들어 있었다.
설득이 아니라
정리.
“그 여인 때문입니다.”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죽은 왕의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기억의 것입니다.”
윤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손이 검자루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것이
위협인지,
습관인지
하륜은 굳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대답은 늘
손끝에서 먼저 나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공양왕의 피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륜이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일수록
더 오래 살아남습니다.”
그의 시선이
윤검의 얼굴에서
연이 있을 법한 자리로
한 번 옮겨갔다.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다고
믿고 싶은 표정이었다.
“태조께서
직접 움직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말에
윤검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났다.
하륜은
그 어긋남을
붙잡지 않았다.
붙잡아도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 확신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왕의 뜻입니다.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남아 있는 가능성을
정리하겠다는.”
윤검이 낮게 물었다.
“그래서
나를 부른 거냐.”
하륜은
고개를 저었다.
“부른 게 아닙니다.”
잠시,
그는 한 박자를 늦췄다.
그 멈춤은
계산이라기보다
확신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알게 한 겁니다.
당신은
이제
모른 척할 수 없는 자리에
와 있으니까.”
알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선택이었다.
윤검은
눈을 들었다.
“연을
지우겠다는 말이냐.”
하륜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한 문장을
조금 덜 정확한 칼날처럼 세웠다.
“지워지는 건
대개
사람이 아니라
이름입니다.”
윤검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 순간,
윤검의 머릿속에
짧은 생각이 스쳤다.
연이 없으면,
모든 것이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은
아직
형태를 갖추기 전이었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그는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 했다.
그러나
지워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륜은
그 힘의 방향을
보고 있었다.
윤검이 누구를 베는지가 아니라,
끝까지 베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을 죽이는 건
쉽습니다.”
하륜이 말했다.
“하지만
죽은 칼은
언제나
다른 손으로 돌아갑니다.”
윤검은
그 말이
자신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하륜은
조용히 덧붙였다.
“살아 있는 칼은
속도를 늦춥니다.
지키려는 것이 생기면
더 늦어집니다.”
그 말은
윤검에게가 아니라
윤검의 뒤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안전합니다.”
하륜은
마지막 문장을
거의 숨처럼 낮게 흘렸다.
“당신이
아직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말은
거기까지였다.
하륜은
더 머물지 않았다.
간계는
언제나
충분한 이유를 남긴 채
먼저 물러난다.
그러나
그 이유가
정말 충분한지는
언제나
피가 말라붙은 뒤에야
알게 된다.
같은 시각,
다른 길에서는
칼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방원은
태조의
호위무사 앞에 섰다.
이번에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군사들이었다.
“아버지를
내가 직접 모시겠다.”
말은 짧았지만,
숫자는
그 뜻을
이미 대신하고 있었다.
“왕을 노리는 자가 있다.”
이방원의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사신무를 무너뜨린 검.
청룡을 돌려보낸 자.
그리고 지금은
죽은 왕의 이름을
곁에 둔 자.”
호위무사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검 위에서 멈췄고,
눈은
전장이 아니라
사람의 끝을 먼저 읽고 있었다.
오래 살아남은 자의
직감은
언제나
칼보다 먼저 움직였다.
윤검은
연을 찾았다.
“사실이냐.”
연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윤검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왜
말하지 않았지.”
연의 입술이
아주 잠깐
열렸다가 닫혔다.
“말하면
네가 떠날까 봐.”
그 말은
변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윤검의 가슴에는
칼처럼 박혔다.
“떠나는 게 아니라
함께 결정했어야지.”
윤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자리가
정해지는 건….”
그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연은
주먹을 쥐었다.
“너를
살리고 싶었어.”
그 말이
윤검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살린다는 말은
때로
사슬처럼 들린다.
연이
조금 더 낮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살고 싶었어.”
윤검은
검을 집어 들었다.
“왕이
직접 온다면…”
연이
말을 이었다.
“… 태조가.”
그 이름은
발등 위에
돌처럼 떨어졌다.
무겁고,
피할 수 없고,
한 번 인식되는 순간
자리를 옮기지 않는 무게였다.
윤검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
연의 눈이
더 크게 흔들렸다.
“왕을
막겠다는 거야?”
“아니다.”
윤검의 대답은
서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신도 아니었다.
“사람을
지우러 오는 걸
멈추겠다는 거다.”
그는
연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움직이지 마.”
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붙잡고 싶었지만
붙잡는 순간
그가 더 빨리 떠날 것 같았다.
그날 밤,
두 개의 길이
같은 곳을
향해 열렸다.
하나는
하늘을 지키기 위해,
하나는
사람을 지우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사이에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전장이
아직 소리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장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계산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