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부엌 불빛만 환했다.
한편에 연탄불이 은근히 타올랐고,
그 앞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탄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창문엔 김이 뽀얗게 서렸다.
낡은 양은냄비가 덜그럭거리며 흔들리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깨웠다.
문틈으로 스며든 찬 기운이 발목을 감쌌고,
손등으로 김 서린 유리를 훔치면 물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도마 위에서 칼이 또각또각 부딪히는 소리.
어머니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콩나물을 다듬고, 달걀을 부치고, 도시락통을 여닫으며
손길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달걀이 지글지글 뒤집힐 때 고소한 냄새가 퍼졌고,
도시락 뚜껑이 닫힐 때마다 ‘딸깍’ 하는 소리가 새벽을 찍었다.
나는 문틈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머니는 기름얼룩이 묻은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다.
낡았지만, 문틈 바람에 자락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새벽마다 공장으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낮이면 남의 집일을 도우셨다.
두 분의 하루는 늘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품값은 적었고 손은 늘 갈라졌다.
손톱 밑 검은 선은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도시락만은 거르지 않으셨다.
멸치볶음, 달걀부침, 김 한 장.
별건 아니었지만, 뚜껑을 열면 정성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아침마다 밥 위에 김을 얹고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담으시던 그 습관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밥의 미지근한 온기와 김의 바삭함이 손끝에 전해졌다.
아침 등굣길, 가방 속에는 언제나 양은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교문 앞에는 벌써 친구들이 모여 떠들었고,
가끔은 학교 앞 구멍가게 문종이 가볍게 울렸다.
나는 도시락을 꼭 안은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가방끈이 어깨를 눌러도 마음만큼은 묘하게 든든했다.
금속 뚜껑의 미열이 손바닥에 고였다.
점심시간이면 교실에 도시락 냄새가 퍼졌다.
양은 도시락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숟가락이 그릇을 치는 소리,
김치 냄새와 밥 냄새가 뒤섞이며 공기가 금세 달아올랐다.
그 무렵 우리 반엔 드물게 보온 도시락을 들고 오는 아이도 있었다.
은빛 도시락통에 국과 반찬이 따로 담긴, 보기만 해도 부러웠던 도시락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양은 도시락이었고,
교실은 김치와 밥, 달걀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매번 내 도시락은 소박했지만,
밥 위에 멸치볶음을 얹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짭짤한 단맛이 퍼질 때마다
새벽 부엌의 노란 불빛과
칼질하던 어머니 손의 리듬이 함께 떠올랐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아침을 조금 늦게 맞으셨다.
허둥지둥 부엌으로 나오시더니 도시락을 못 챙긴다며
주머니에서 돈 몇 장을 꺼내 주셨다.
“오늘은 그냥 빵 사 먹어라. 미안하다.”
그날은 가방이 유난히 가벼웠다.
등굣길,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단팥빵을 두 개 샀다.
점심시간에 봉지를 뜯자 달큰한 냄새가 확 퍼졌다.
친구들이 몰려와 “나도 한입만” 하며 손을 내밀었다.
하나는 웃으며 건넸지만, 남은 빵을 베어 물 때
속이 허무하게 비어 있는 듯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부드러운 빵이었지만,
손바닥의 온기를 채우던 그 따뜻함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제 아이 도시락을 챙기는 부모가 됐다.
매일은 아니지만, 소풍이나 나들이 날이면 아침부터 불을 켜고 반찬을 준비한다.
그럴 때면 문득 오래전 어머니의 손이 겹쳐 보였다.
아이 가방에 도시락을 넣어 주면
인사도 없이 후다닥 뛰어나가는 뒷모습만 남았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 안 공기를 가만히 진정시켰다.
때로는 반찬을 뭘 넣을지 고민하다가
다시 어머니를 떠올리곤 한다.
콩나물이나 멸치볶음 같은 평범한 반찬이
사실은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반찬부터 찾았지만,
지금은 그 도시락을 싸던 손길이 먼저 떠오른다.
뚜껑의 걸쇠가 ‘딸깍’ 닫히는 소리,
막 지은 밥의 수증기가 손바닥을 데우는 감촉.
이제 그 부엌은 사라졌다.
기와지붕도 없어지고, 골목도 바뀌었다.
그래도 그 불빛만은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
어둠을 밀어내던 노란 불빛,
그 앞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뒷모습.
그 빛은 단순한 부엌등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 주던 온기였다.
나는 지금도 그 노란 불빛 아래 서 있는 기분이다.
그 빛이 내 삶의 길을 비추었고,
그 손끝의 온기가 나를 지금까지 데려왔다.
이제야 안다.
그 새벽의 밥 한 끼가,
한 사람의 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는 것을.
그 작은 도시락 속에는
어머니의 하루와, 우리의 삶이 함께 담겨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따뜻한 불빛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