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들녘에는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바람에 벼 이삭이 일렁였고, 사이사이 메뚜기들이 튀어 올랐다.
군데군데 메밀꽃이 피었으며,
마을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번져 갔다.
그 시절 농촌 아이들에게 소풀 먹이기는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놀고 싶어도 먼저 맡은 몫을 해야 했다.
나 역시 그 무리 속에 있었고, 그 일을 피할 수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또 시키시겠지… 나는 놀고 싶은데.”
집에 들어서자 외양간에서 “음메” 소 울음이 들려왔다.
나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혼잣말했다.
“쉿, 들키면 안 되는데.”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무와 배추를 다듬고 계셨다.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마당까지 흘러나왔다.
사랑방에는 아버지가 책장을 넘기며 앉아 계셨다.
나는 안방 장롱 속에 몸을 웅크렸다.
“오늘은 이렇게 숨어서 좀 쉬어야겠다.”
옷가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틈새로 들어온 빛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장롱 안은 금세 답답해졌다.
그때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어머니 얼굴이 나타났다.
“여기 있었구나. 어서 나와라. 아버지가 찾으신다.”
곧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얼른 소풀이나 먹이고 오너라!”
나는 툭 내뱉듯 대꾸했다.
“왜 맨날 저만 시키세요. 동생들도 있는데…”
아버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소는 네가 끌고 다녀야 정이 붙는 법이다. 큰아이는 책임도 져야지.”
나는 낫을 들고 외양간 소 고삐를 잡아 문밖을 나섰다.
억지로 문턱을 넘는 순간, 동생들이 뒤에서 손을 흔들며 웃었다.
“잘 다녀와!” 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걸 듣자 괜히 더 속이 상해 고개를 홱 돌렸다.
마을 어귀 개울가 옆 풀밭에 소를 매어 두었다.
개울물 소리가 들려오고,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때 근처 느티나무 아래 공터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무줄놀이 하자!”
“아니야, 술래잡기 먼저 하자!”
나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소 곁으로 다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소야, 넌 맨날 풀만 먹으니 심심하지 않니.
나는 매일 너만 지키고 있으려니 지겹구나.”
소가 낮게 울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나 잠깐만 놀다 올게.
혼자 도망가면 안 된다? 약속해야 해.”
소가 다시 울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 나갔다.
“얘들아, 나도 같이 하자!”
공터에는 고무줄이 걸려 있었고,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며 깔깔 웃어댔다.
나도 함께 뛰어들었지만 자꾸 걸려 넘어졌고, 그때마다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곧 술래잡기가 이어졌고, 나는 풀숲에 숨어보다 끝내 잡혔다.
그렇게 웃고 뛰는 사이, 해가 기울어 가는 줄도 몰랐다.
어둠이 내려앉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소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 소는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는 소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논두렁과 냇가, 뒷산까지 헤맸지만 흔적조차 없었다.
심장은 쿵쿵 뛰고, 바람에 갈대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달빛에 비친 허수아비까지 괜히 무섭게 보여 결국 눈물이 터졌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달려갔다.
외양간 앞에 이르자 “음메”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는 이미 들어와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보자마자 호통쳤다.
“소는 혼자 집에 잘 들어왔는데, 넌 뭘 하다 이제 오냐!”
나는 울먹이며 서 있었다. 어머니가 거들었다.
“아이고, 그만하세요. 애가 놀라서 저러는 거 안 보이세요.”
아버지는 담배를 꺼내다 말고 한숨을 내쉬더니,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호통 속에도 미묘한 웃음기가 비쳤다.
어머니는 끝내 나를 감싸주셨다.
그때 막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곧 형제들이 따라 웃었고,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눈물범벅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웃음에 스며들었다.
그날 밤, 외양간 소 울음과 집안 웃음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그 웃음은 그저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날의 겁과 눈물은, 어린 나에게 ‘책임’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려 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