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풍경, 남아 있는 추억

by 연월랑

이 동네를 떠난 지 어언 이십 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웃음소리가 스며 있던 골목들,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그때의 빛과 냄새가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걸어본 길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학교 뒤 담벼락 너머로 이어지던 오솔길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유리벽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예전엔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몰래 담을 넘어 술래잡기를 하던 곳.
지금은 차가 드나드는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기차는 다니지 않았지만,
마을 끝에는 여전히 철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잡초가 뒤덮은 레일 위로 바람이 스쳤고,
어린 우리들은 그 위를 달리며 마치 진짜 기차처럼 웃음을 내달렸다.

멀리 보이던 발전소 굴뚝은 검은 연기 대신 흰 수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예전엔 저녁 하늘이 늘 뿌옇게 흐려졌는데,
이제는 한결 맑아진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학교 앞의 느티나무는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굵은 가지마다 초록이 가득했고,
아이들의 그늘이자 약속의 장소로 우리를 품던 나무였다.

바람이 잎새를 흔들자,
오래된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그 맞은편엔 작은 분식집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가
오뎅 국물을 호호 불어 먹곤 했다.

튀김 냄새와 매운 떡볶이 양념은 교복에까지 스며 있었고,
그때의 오뎅 국물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어릴 적 나를 은근히 감싸주던 온기였다.

내 몫으로 튀김 하나를 더 얹어주던 아주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그립다.
이젠 그 자리에 카페가 들어섰고,
유리창 너머로 오래 전의 내가 희미한 빛결처럼 떠올랐다.



아이들이 뛰놀던 공터는 절반이 건물에 가려 있었지만,
가을이면 여전히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었다.

흰빛과 분홍빛이 바람에 일렁일 때면
그 시절의 웃음소리가 꽃향기와 함께 되살아났다.

잠시 눈을 감으니,
그 웃음이 바람 속에 섞여 나를 스쳐갔다.



낮은 대문과 기와지붕은 기억 속으로 물러나고,
대신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들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발밑의 아스팔트는 매끈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돌길의 서늘한 감촉이 숨어 있었다.

사람들로 붐비던 시장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대형마트의 불빛이 낯설게 번지고 있었다.

호객 소리와 아이들 웃음 대신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만이 공기를 갈랐다.



가장 마음이 저렸던 건,
내가 한때 짝사랑하던 아이가 살던 집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의 모습이 선명한데,
그 자리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몇몇 흔적은 남아 있었다.
벽돌담 사이로 자라난 잡초,
빛바랜 문방구 간판.

그 앞에 서자 어린 시절의 함성이 귓가를 스쳤다.
저녁놀 속에서 뛰놀던 친구들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운동장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있었다.
공을 차며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래전 나의 웃음이 그 속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는 듯했다.

사라진 풍경은 많았지만,
웃음과 발자국 소리만큼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예전 이웃이던 동네 아저씨였다.

“오랜만이네, 무슨 일로 왔어?”
“그냥 문득 생각나서요. 한번 보고 싶어서요.”
“그래, 사람은 결국 돌아오게 돼.
추억이 그 길을 알려주거든.”

짧은 인사였지만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사라진 것들 사이로
아직도 이어져 있는 정과 온기가 느껴졌다.



시간은 내 기억을 기다려주지 않았지만,
기억은 여전히 그 시간을 품고 있었다.

세상은 변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세상은
여전히 그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어 다행이다.”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내 어린 날을 만났다.

사라진 풍경은 내 밖에서 사라졌을 뿐,
내 안에서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은 바래지 않은 채
지금의 나를 다시 불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나를 살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사라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풍경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전 08화종이배, 달빛을 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