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나무 아래의 약속

by 연월랑

마을 뒷동산 마루터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탁 트여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그 한가운데엔 버들나무 한 그루가 묵묵히 서 있었다.
여름이면 가지가 길게 흩날려 잔디 위를 물결처럼 덮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잎사귀들이 부딪혀 내는 소리가
잔잔히 번져 가며, 아이들의 웃음과 뒤섞였다.

아이들은 그곳을 놀이터 삼아 하루를 보냈다.
숨바꼭질을 하며 잔디 사이를 굴렀고,
돌멩이로 집 모양을 만들며 저마다의 세상을 지었다.
버들가지에 매달렸다 떨어져도,
풀잎 위에 흩어진 웃음은 금세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 무리 속, 소녀의 눈길은 언제나 한 소년에게 머물렀다.
소년은 달리기를 오래 하지 못했고,
언덕을 오르면 숨이 찼다.
소녀는 장난스레 “운동 부족이야.” 하며 웃었지만,
그 말은 그날 이후 오래 마음에 남았다.

소년의 눈빛은 맑았다.
새벽 언덕에서 책을 읽거나,
풀잎 사이 벌레를 가만히 바라보던 모습.
그의 말은 짧고 조심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작고 단단한 다짐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소년은 버들잎을 꺾어 피리를 만들었다.
가늘고 투박한 풀피리에서 맑은 소리가 흘렀다.
선율은 버들가지 사이로 퍼져 하늘로 흘렀고,
소녀는 알 수 없는 떨림으로 숨을 고르며 그 소리를 들었다.
피리가 멈추자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다시 불어 달라며 졸랐고,
소년은 웃으며 풀피리를 고쳐 불었다.
그 소리는 어린 마음에 오래 남아,
두 아이만의 비밀스러운 여름이 되었다.

그날 두 아이는 작은 상자 두 개를 준비했다.
구슬 하나, 낡은 단추, 하트 모양의 머리띠.
아이들의 마음에는 그 모든 게 보물이 되었다.
버들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상자를 묻으며
소년이 말했다.
“열 해 뒤에 같이 열자. 약속이야.”
진지한 눈빛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무언가를 적었다.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종이를 접어 넣었다.
그들의 약속은 바람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소년은 갑작스레 서울로 이사했다.
소녀는 버들나무 아래에서 혼자 귀를 기울였다.
풀피리의 소리가 바람결에라도 실려올까,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잎사귀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세어 보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풀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후로는 편지가 오락가락했다.
짧은 문장 속에 늘 “괜찮다”는 말이 있었다.
글씨는 또렷했지만, 마지막 줄로 갈수록 잉크가 옅어졌다.
“나는 좋아지고 있어. 조만간 버들나무 아래에서 보자.”

그 한 줄이 봄날의 바람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그 약속은 오지 않았다.
편지의 잉크는 색이 바래고, 종이는 햇빛에 질었다.
그 무렵부터 바람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소녀는 여전히 언덕에 올랐다.
잎이 흔들릴 때마다,
바람 사이 어딘가에서
풀피리의 미세한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세월이 흘러,
소녀는 도시로 떠났다.
도시의 불빛 속에서 버들나무는 점점 기억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방학이면 늘 그 자리에 돌아왔다.
풀빛도, 바람도, 나무의 그림자도 그대로였지만
풀피리의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 여름,
서랍 속에서 작은 열쇠 하나가 손끝에 닿았다.
날짜를 본 순간,
숨이 잠시 멎었다.
열 해 전, 약속의 날이었다.

소녀는 삽을 들고 언덕으로 향했다.
햇빛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들고,
바람은 가볍게 귓가를 스쳤다.
그 바람 속엔 오래된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버들나무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머뭇이던 그때,
언덕 아래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가 닮아 있었다.
청년은 말없이 작은 열쇠를 내밀었다.
“그 친구와 함께 오고 싶어 했어요.
오늘은 꼭 지켜 달라 부탁했습니다.”

소녀는 상자를 열었다.
풀피리 하나, 그리고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내게 희망 같은 존재였어.
네가 웃을 때마다 내 아픈 가슴은 가벼워졌고,
버들나무 아래의 시간은 내 삶을 버티게 했어.
언젠가 다시 풀피리를 들려주리라는 마음,
그게 나를 끝까지 살게 했어.

소녀는 손끝으로 글씨를 더듬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청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 소녀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청년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내 숨결을 바람에 맡긴다.
그 바람이 네게 닿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소녀는 자신이 묻었던 상자를 조심스레 꺼냈다.
흙먼지가 흩날리며 뚜껑이 열릴 때,
작은 금속 소리가 났다.
하트 모양 머리띠의 한쪽 조각이
살짝 굴러 상자 밖으로 떨어졌다.

소녀는 그 조각을 주워 들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때의 웃음, 바람, 그리고 풀피리의 선율이
귀 끝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잎사귀 사이로 번졌다.
그날의 바람이 다시 불어오는 것 같았다.

소녀는 머리띠 조각을 천천히 상자 안에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흙을 덮었다.
버들잎 몇 장이 흙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 위로 손바닥을 얹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잎사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그 소리는 풀피리의 메아리 같았다.

그녀는 버들나무에 기대어
풀피리를 불었다.
소리는 금세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도착이 되었고,
기다림은 결국 사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군자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