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언젠가 빛으로 피어난다
햇빛이 창가를 스쳤다.
먼지 한 알이 그 빛을 받아 붉게 떨었다.
피지 않은 꽃잎 위로 조용히 내려앉은 그 빛 속에서,
아직 이름 없는 생명의 숨결이 미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상은 아직 봄의 문턱에 있었다.
모든 색이 희미했고,
한 줄기 새싹은 짙은 초록 속으로 몸을 오므리고 있었다.
그러나 잎맥 사이로 스며든 빛 한 줄기에서
이미 붉은 기운이 천천히 돋아나고 있었다.
그때 창밖을 지나던 누군가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햇살에 비친 붉은 잎을 바라보며
아주 작게 미소 짓는 모습이 보였다.
그 표정 하나가, 내 안의 어둠을 조금 풀었다.
겨울의 땅속에서도 생명은 잠들지 않았다.
그 어둠을 버티는 시간 속에서,
보이지 않는 붉음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세상의 눈에 닿기 전부터
그 새싹은 자기 안의 빛을 익혀가고 있었다.
나도 그 빛을 닮고 싶었다.
한때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이 작은 흔들림이 언젠가 꽃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꽃은 어둠을 지나야 만
자신의 색을 알게 된다.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존재는 스스로의 빛을 익힌다.
남들보다 늦게 피어나는 마음도 그렇다.
겉으론 고요하지만,
내면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빛이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가끔은 그 어둠이 무서울 때도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빛,
그 안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정적조차 나를 조금씩 자라게 했다.
바람이 지나가자
잎의 윤곽이 반짝였다.
빛이 그 위를 따라 움직이며
세상의 그림자를 걷어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존재란 피어남의 결과가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기까지의 흔들림이라는 것을.
나는 그 빛을 믿으려 애쓰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빛이 내 안을 지나 타인에게 닿을 때,
세상은 비로소 따뜻해졌다.
언젠가 그 푸른 새싹이 완전히 피어날 때,
그 붉음은 단지 화려함이 아니라
어둠을 견딘 시간의 색일 것이다.
그 붉음은 암홍에서 자홍으로,
시간의 결마다 조금씩 변하며 깊어질 것이다.
사람 또한 그러하다.
지금은 빛나지 않아도
그 마음의 결 속엔 이미 빛이 있다.
그날,
햇살이 마지막 잎맥을 스칠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그 모든 기다림과 온기가 머물던 자리의 이름이,
— 작약이었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
그 향기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날아온 꿀벌이 그 향에 이끌려와
다른 생명을 이어 주었다.
그 순간 꽃은 알았다.
아름다움이란 혼자 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온기라는 것을.
그때 창밖의 사람도 눈을 감았다.
햇살이 얼굴 위에 머물자,
그는 두 손을 모아 조용히 말했다.
“오늘의 빛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오후,
꽃잎 사이로 흩어진 햇살이 나를 감쌌다.
그 빛은 말이 없었지만
모든 대답은 그 침묵 속에서 천천히 피어났다.
존재는 언젠가 빛으로 피어난다.
그 빛은 자신을 넘어서
모든 이를 비추는 온기가 된다.
그 빛은 오래 머물렀다.
새의 깃털을 스치고,
풀잎 끝에 머물렀다가
바람을 따라 다시 흩어졌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보았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의 붉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