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꽃의 온기

다시 피어날 마음과, 사라지지 않는 온기에게

by 연월랑

여름의 들판 위,

백일홍이 붉은 물결처럼 피어 있었다.

햇살은 강했고, 바람은 느렸으며,

그 사이에서 나는 한 송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는 수백 송이의 나와 같은 꽃들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피어,

이 여름의 시간을 빛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때, 한 소녀가 들판 끝에 멈춰 섰다.

손에 작은 그림책을 든 채,

붉은 꽃들 사이를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는 순간,

나는 바람보다 먼저 흔들렸다.

그녀의 눈빛엔 미묘한 슬픔이 있었다.

무언가를 잃은 듯하면서도,

그 마음을 꼭 품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췄다.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와 그리움이 뒤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들판을 뛰어다니며 웃음을 흩뿌렸고,

어른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연인과 손을 맞잡았고,

어떤 이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가 피어 있는 이 여름이

누군가의 마음속 오래된 기억이 된다는 것을.

그 인연의 흔들림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계절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다.




시간이 흘러,

바람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붉은 잎맥이 옅어지고,

꽃잎 끝에서 빛이 내려앉았다.

나는 알았다.

이제 내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때,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직 남은 일이 있어.”


그건 내 안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남은 힘을 모아 씨앗을 품었다.

바람이 잎맥을 스치자,

미세한 진동이 내 안에서 울렸다.

그건 단순한 생명의 본능이 아니라,

누군가의 내일을 이어주고 싶다는 의지였다.




바람이 불었다.

내 씨앗이 흩어졌다.

빛은 그 길을 따라왔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느꼈다.

사라짐이 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닿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을.


멀리서 다시 그 소녀가 걸어왔다.

그녀는 들판 끝에 앉아,

떨어지는 꽃잎을 조용히 손바닥에 받았다.

그 눈빛에는 슬픔 대신 다짐이 있었다.

“내년에도, 꼭 다시 보러 올게.”


그 말이 바람을 타고 내게 닿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지만,

내 안의 온기는 꺼지지 않았다.




밤이 오자, 들판은 고요했다.

나는 흙 위에 남은 온기로 세상을 감쌌다.

내 붉음이 사라져도

내 온도는 땅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자,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오늘의 빛이, 내일의 숨이 된다.”

그 속삭임이 내 마지막 잎맥을 흔들었다.


언젠가 이 흙 위에

새로운 싹이 돋아날 것이다.

그때 누군가 또다시 웃고,

그 웃음 속에서 나의 계절이 되살아날 것이다.


나는 이제 진다.

그러나 내 안의 온기는 아직 완전히 식지 않았다.

나의 빛은 흩어진 씨앗 속에 남아

또 다른 여름을 향해 간다.

피어남이 아름답다면,

지는 일은 그 아름다움을 이어주는 약속이다.

사라짐의 끝에서,

나는 내일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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