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기억이 다시 피어나는 자리
아이에게 남산은 처음이었다.
전날부터 설렌다며 가방을 챙기던 아이의 손끝에서
봄빛이 부드럽게 번져 나왔다.
그 빛이 방 안 공기 속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 빛이 거실 벽에 닿을 때마다
내 마음도 조용히 흔들렸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오래전 그 오르지 못한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의 남산은 먼 꿈같았다.
어머니, 동생, 사촌과 함께 줄을 섰지만
케이블카는 끝내 닿지 못한 하늘 위에 있었다.
줄은 언덕 아래까지 이어졌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흘러갔다.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언덕 아래엔 붕어빵 냄새가 감돌고,
철제 기둥이 삐걱이며 울리는 소리가 공기를 가르렀다.
햇살은 이마에 스며들었고,
봄바람은 셔츠 끝을 흔들며 작은 파동을 남겼다.
그때의 나는 케이블카를 꼭 타고 싶었다.
하늘로 이어진 철선이
내게는 멀리 닿을 수 없는 꿈의 다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주말의 케이블카는
손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았다.
언덕은 가팔랐고,
발끝마다 흙먼지가 일어났다.
결국 오르지 못한 채 멀어지는 소리를 바라보며,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비워졌다.
그때의 하늘은 유난히 높았고,
나는 그 높이를 오래 잊지 못했다.
기다림 끝에서 향한 곳은 돈가스집이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던 볕 냄새,
기름이 튀며 내던 잔잔한 소리,
소스의 달콤한 향이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다.
포크를 쥐던 손끝의 열기,
그 따스함이 봄의 냄새처럼 오래 남았다.
한입의 따뜻한 맛이 혀끝에 스며들며,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소년은 그 뒤로 바빠졌다.
학교와 일, 삶의 길목들 사이에서
남산은 서서히 잊혔다.
해마다 봄은 지나갔고, 남산은 점점 머나먼 풍경이 되었다.
그 기억은 먼 봄의 빛처럼 희미해졌고,
언덕 위의 하늘도 어느새 마음속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제 남산은 달라졌다.
버스가 정상 가까이 오르고,
젊은 연인들이 웃으며 셀카를 찍는다.
커피 향이 바람을 타고 퍼지고,
길가의 벚꽃 잎이 햇살에 부서지며
하얀 파문처럼 흩날렸다.
그 흩날림 속에서, 오래 전의 봄이 잠시 스쳐갔다.
그 속을 가족이 함께 걸었다.
아내의 걸음, 아이의 웃음,
그 모든 발자국이 바람의 결 속에 스며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자
도시는 유리처럼 투명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케이블카의 철음,
창문에 스친 바람의 미세한 진동이
가슴 안쪽으로 전해졌다.
아이의 눈 속에 비친 불빛이
어릴 적 나와 어머니를 불러왔다.
그때의 기다림이 오늘의 여유로 이어졌다는 걸,
나는 아무 말 없이 느꼈다.
내려오는 길,
도시는 저녁빛에 물들었다.
가족의 웃음이 뒤에서 바람처럼 흘러왔다.
아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 온도가 오래전 어머니의 손길과 닮아 있었다.
세월은 흘러간 것이 아니라
모양을 바꾸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 듯했다.
바람에 실린 웃음이
저 멀리 흩어질 때,
마음속 남산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남산의 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 봄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을 뿐.
그날 오르지 못한 언덕을
이제는 온 가족이 함께 걸어 올랐다.
아이의 웃음이 바람을 타고 남산 아래로 흘러갔다.
그 웃음 속에 오래된 봄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 순간,
빛과 바람과 온기가 하나로 이어져
시간은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봄은,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