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바다를 향해 불렀던 이름

마음이 한밤의 파도처럼 흔들리던 시절

by 연월랑

처음엔 그저 좋았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안쪽이 조용히 데워졌다.

그게 사랑인지조차 몰랐다.

어느 날 햇빛처럼 스며든 감정 하나가

말없이 오래 머물렀을 뿐이다.


그녀는 같은 학교 사람이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학원 복도에서 몇 번 스쳤을 뿐인데

묘하게 오래 남았다.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집이 가까워서 가끔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녀는 짧게 웃었다.

인사인지, 착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미소는 그 시절의 공기 속에서

한 번 더 반짝이며 잔상을 남겼다.


대화도 거의 없었고, 특별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얼굴과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이름보다 먼저 기억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미소 하나도

쉽게 흩어지지 않고 오래 머물렀다.




군대에 있을 때였다.

한밤 근무를 서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았다.

별빛은 멀리에 있었지만

그 아래의 마음은 이유 없이 따뜻했다.

입대 전엔 흐릿하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불쑥 떠오르곤 했다.

한 번 지나간 이름이

바람 속 파동처럼 다시 번져왔다.


휴가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더 분주해졌다.

동네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 시절의 나에겐

그 설렘 하나면 밤이 환해졌다.




하루는 결국 용기를 냈다.

전화를 걸기 직전, 손끝이 아주 가볍게 떨렸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흔들렸다.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의 동창인데요… ○○ 있나요?”


“여보세요. 누구세요?”


짧은 정적 뒤에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나요?”


그리고 돌아온 대답.


“네, 있어요.”


그 한마디 안에서

바람이 멎고, 시간이 아주 살짝 접혔다.

목소리는 금방 사라졌지만

남은 여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 동안 마음은 제자리에서 맴돌며

작은 파문을 천천히 만들었다.




휴가 첫날이었다.

무심히 집 근처를 지나 볼까 했지만

괜히 다른 길을 골랐다.

마주칠 용기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피했다.

그 시절의 나에겐

피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휴가는 금방 지나갔다.

부대로 돌아간 첫날밤,

해안 근무에 다시 섰다.

바람은 더 차갑고,

파도는 쉼 없이 부딪혔다.

짠내가 스친 공기가 목울대까지 깊게 스며들었다.

말이 그 안에서 몇 번이나 멎었다.


아무도 없는 바다를 향해

나는 문득 이름을 불렀다.


“잘 지내라, ○○야.”


그 외침은 어둠을 밀고 나아가

바다 쪽으로 흩어졌다.

잠시 뒤, 파도는

작은 울음처럼 되돌아왔다.

그 울음에 마음 한쪽이 천천히 비워졌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떠오른다.

불쑥 마음을 스치는 미소 하나,

말하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작은 떨림.

그때의 공기가 아주 얇게 되살아나는 순간들이다.


돌이켜보면

그 마음은 실패도 아니었고

누구에게 도착하지 못한 편지도 아니었다.

다만 젊은 날 한편에서

말없이 자라던 감정의 결이었다.

그 결이 지금의 나에게까지 닿아

어느 조용한 밤이면 슬며시 빛을 남긴다.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별빛은 그 위를 천천히 건너며

오래된 이름들을 조용히 흔들어 준다.

그날 어둠 속에 던졌던 한마디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작게 파문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듣지 못한 목소리였지만

그 파문만큼은 오래전에 멈추지 않은 채

지금의 나를 천천히 데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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