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날 아침은 유난히 조용했다.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확인했다.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빛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기다림이 많은 하루가 될 것 같았고,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수를 하며 손끝이 물에 스칠 때,
차가운 물결 사이로
벚꽃이 흩날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학원 복도,
자판기 옆에 서 있던 그 애.
창문 너머로 쏟아지던 햇빛 사이를
꽃잎이 흘러갔다.
그는 연필을 돌리며 한참 말이 없었다.
“요즘은… 너 없으면 좀 허전해.”
짧은 말, 담백한 시선.
말이 끝난 뒤에도
복도는 그대로였다.
그날 이후 둘은 자연스럽게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서로 문제를 나누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책을 펼친 채 페이지를 맞춰 넘기는 속도만
조용히 겹쳤다.
형광펜 긁는 소리,
문제집 덮는 소리,
의자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
말보다 깊은 이야기가
그 사이에 쌓였다.
놀이공원, 관람차 위에서 그는
늘 같은 쪽만 바라봤다.
내려갈 때쯤,
잠깐 웃음을 보였다.
미술관에서는
한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설명은 없었지만
그 침묵이 그녀를 편안하게 했다.
날이 차가워진 어느 날,
문제집을 덮던 그가 물었다.
“너…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학원 와?”
그녀는 알았다.
그 말이 일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다림에 관한 것임을.
그해 이브날,
둘은 학원 대신 불빛이 모인 쪽으로 걸었다.
손에 든 길거리 음식,
시선은 자꾸 위로 올라갔다.
트리는 생각보다 가까웠고,
빛은 밤을 채웠다.
사람들 사이,
잠시 멈춘 그가 말했다.
“이제… 진짜 바빠질 것 같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의미는 충분했다.
“딱 1년만, 각자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그 말은 떼어 놓자는 뜻이 아니라
지켜보자는 쪽에 가까웠다.
“응. 그럼 1년 동안
각자 자리에서 버티자.”
그리고 약속 하나.
1년 뒤, 크리스마스이브,
이 트리 아래에서 만나자고.
그 말이 끝났을 때,
겨울이 한 번 더 깊어졌다.
그날 이후
하루는 짧고 밤은 길었다.
교실, 버스, 계절,
반복된 하루 속에서
버텨온 시간이 쌓였다.
그리고 이브날.
그녀는 코트를 여미고
명동으로 걸었다.
트리는 여전히 컸다.
빛 아랫사람들은 분주했고,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주머니 속 손가락을 눌렀다.
손끝이 차가웠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괜찮았다.
십 분이 지나고,
사람들 사이가 조금씩 움직였다.
트리의 불빛이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다.
그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그때, 발소리.
천천히, 숨 약간 가쁘게,
목발을 짚고 그가 나타났다.
“미안. 오다가 넘어져서
병원 들렀어.”
담담한 말.
그가 이 자리에 도착했다는 사실로
충분했다.
하늘에서 작은 빛이 내려왔다.
트리 불빛과 겹치며
주변이 흐려졌다.
그녀는 그의 옆에 섰고,
어깨가 살짝 닿았다.
충분했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약속은,
지금 여기 있었다.
밤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