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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영 Oct 25. 2024

다시 만나는 디지몬 세계

- 환상의 짝, 정석과 쉬라몬

 

천선란, 『아무튼, 디지몬』



    최근 천선란 작가님의 『아무튼, 디지몬』을 읽고 디지몬 어드벤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릴 때 나는 디지몬 어드벤처를 참 좋아했다. 친구들이 포켓몬이나 원피스를 볼 때에도 끝까지 디지몬 어드벤처만을 무한 반복해서 지금도 대사가 기억날 정도니까. 여러분이 <디지몬 어드벤처>를 즐겨봤던, 또 꿈꿨던 나의 동년배라면 오프닝 간주만 듣고도 심장이 빠르게 뛸 것이다. 일곱 명(여덟 명)의 선택받은 아이들과 함께 디지털 세계를 모험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말이다. 어른의 눈을 가진 채 다시 만난 디지털 세계, 아이와 어른 사이의 그 미묘한 감상의 차이를 느끼면서 어릴 때는 보지 못했던 부분에 관해 남겨볼까 한다.



    환상의 짝, 정석과 쉬라몬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디지몬이 친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태일 옆에는 아구몬이, 매튜 옆에는 파피몬, 소라 옆에는 피요몬, 한솔 옆에는 텐타몬, 정석 옆에는 쉬라몬, 미나 옆에는 팔몬, 나리 옆에는 가트몬이 항상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어릴 때 디지몬 친구들과의 우정을 보면서 내 곁에도 디지몬이 항상 있어주기를 꿈꿨던 것 같다.


 

    모든 등장인물이 사랑스럽지만… "정석"과 정석의 파트너 "쉬라몬"에 관해 한번쯤 이야기하고 싶다. 어릴 때는 정석이 메인 캐릭터가 아니었던 탓에 정석과 쉬라몬, 둘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쉬라몬은 다소 고지식한 정석과 환상의 조합을 자랑하는 디지몬이었다.


    '성실'의 문장으로 대표되는 정석은 아이들 중 최연장자이다. (그때는 나잇값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래봤자 '고작' 6학년이다.) 하지만 우유부단하고 걱정 많은 성격으로 가장 큰 형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한다. 어릴 때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정석을 보면서 얄미워하기도 했다. 이런 정석에 곁에는 늘 밝은 "쉬라몬"이 있다.




  

    아구몬과 태일이 같은 결을 자랑하는 환상의 짝이라면, 이 둘은 반대의 의미로 아주 잘 맞는 짝이라 할 수 있다. 쉬라몬은 정석과 달리 귀여운 외모와 똑 닮은 태평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다. 쉬라몬의 필살기 '물고기 행진'은 공격력이 매우 낮고, 어쩔 때는 택도 없어 보여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또 물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디지몬들이 싸울 때 혼자 정석에게 안겨 있는 (아주 귀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디지몬 어드벤처에서는 쉬라몬 특유의 태평하고 깐족거리는 모습이 정석의 화를 돋우어 서로 투닥거리는 모습이 재미 포인트다. 파일섬에 떨어져 정석이 초조해하며 좌절하고 있을 때도, 쉬라몬은 "너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해봤자 뭐 해"라고 태평하게 말한다. 또 정석이 달걀부침에 소금, 후추가 아닌 다른 것을 뿌려먹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해 화를 낼 때도 쉬라몬은 정석에게 "남이 뭘 뿌려먹든 무슨 상관이야.", "하여간 석이는 꽉 막혔다니까."라며 귀여운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얄밉게 굴고 싸움을 걸어도 언제나 쉬라몬은 정석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다. 정석이 혼자 산에 올라가려고 할 때도 쉬라몬은 자신도 산에 볼일이 있다며 능청스럽게 정석을 따라갔고 또 후반부에서 정석이 혼자 매튜를 찾아 나서겠다고 했을 때는 "미안할 것 없어. 네가 가자면 난 어디든 갈게"라고 말해준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내 옆에 있어준다는 것. 이게 얼마나 꿈같은 일일까?


    정석은 쉬라몬의 곁에서 멋지게 성장하여 점차 연장자 다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파워디지몬(디지몬어드벤처 02)에서 기자몬에게 공격당한 쉬라몬을 찾아온 정석의 모습은 든든하기까지 하다. (정석이 쉬라몬을 쓰담쓰담하는 모습이 엄청 귀엽다. 기분 좋은 일이 필요하다면 꼭 하단 영상을 눌러보시길*)





    쉬라몬의 진화는 이런 정석의 성격을 반영한다. 유니몬과의 싸움에서 석이는 유니몬에 박힌 검은 톱니바퀴를 제거하기 위해 "이건 내가 해야 돼. 난 애들을 지킬 책임이 있단 말이야. 나는 제일 큰 형이니까!"라고 외치며 맨몸으로 돌진한다. 유니몬 위에서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는 정석을 본 쉬라몬(성장기)은 원뿔몬(성숙기)으로 진화한다. 또 정석과 리키가 메가시드라몬의 공격을 당했을 때, 정석은 본인보다 어린 리키를 지키기 위해 리키에게 하나 남은 나무토막을 건네고 자신은 바닷속으로 빠진다. 정석이 가라앉던 바로 그때, 원뿔몬은 쥬드몬(완전체)으로 초진화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을 살리기 위해 큰 형으로서 매번 책임을 지려고 했던 정석. 그리고 그 마음에 부응하듯 진화해 온 쉬라몬. 정석의 문장이 빛남과 동시에 함께 성장한 쉬라몬. 쉬라몬과 정석은 최고의 파트너가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정석이 가진 '성실'이 얼마나 가치 있는 문장인지 깨닫게 된다. 성실의 문장은 대표색도 회색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성실'의 속성을 반영한 것처럼. 화려한 다른 주인공들에게 밀려 어릴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정석.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정석이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보이고, 동생들에게 만만한 형이 아니라 편한 형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열심히 해서 안 될 건 없어"라는 쉬라몬의 말이 새삼 위로가 되는 요즘. 소년 만화를 통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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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4CxsoKqOKvs?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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