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좋다. 봄이 되면 집 안 곳곳에서 생기를 담당하고 있던 화분들을 모아 새 집으로 옮겨 준다. 그때마다 노란 프리지아를 한 다발을 사 와 꽂아둔다. 가슴 설레는 프리지아 향기가 내 방 가득 퍼지면 하루가 충만해짐을 느낀다.
"여니야, 오늘 냉이 캘 건데 반찬 해서 갖다 줄까?
"엄마! 내가 갈게. 냉이 같이 캐자."
우리 집은 보통 3월이 돼야 분갈이를 시작한다. 아직은 조금 이른 시기. 엄마는 신기하게도 내게 흙의 위안이 필요한 순간에 반가운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런데 냉이는 봄에 먹는 거 아니야?"
"겨울냉이는 뿌리를 먹는 거야. 추운 겨울에 뿌리를 깊게 내려서 향도 진하고 몸에도 좋아."
흙 위로 피어난 냉이의 잎사귀는 작고 메마르고 볼품없었다. 그나마 커 보이는 냉이를 찾아 캐기 시작했다. 호미질을 연신하다 보니 아기 손바닥보다 작은 냉이가 따라 올라왔다. 세상에. 겨울냉이는 뿌리를 먹는 거라던 엄마의 말씀이 이제 이해가 갔다. 겨울 냉이는 작은 잎사귀와 어울리지 않게 굵고 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홀로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 몸보다 더 큰 뿌리를 아래로 내리며 견뎌냈구나. 연약하고 볼품없는 겨울냉이는 누구보다 단단하고 굳센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는 참 다르다.
나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온실 속의 화초' '유리감성'이라는 말로 나를 표현한다. 혹은 '순두부'.. 물론 타고난 기질과 성격이 큰 영향을 주겠지만 다른 문제도 있음을 깨달았다.
'내게 온 추운 겨울은 언제였을까. 몇 번이나 있었지? 그리고 난 그 추위를 어떻게 견뎌냈더라.'
추운 겨울이 올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다.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를 나눠가지려고 더 가까이 붙어 의지했고 또는 겨울이 지나가길 바라며 숨어버렸다. '굵고 실한 뿌리'를 내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와 내 주변을 지킬 수 있도록강해지고 싶고, 단단해지고 싶다.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내 안에 깊게 내린 뿌리로 온전히 이겨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곱이곱이내 힘으로 넘다 보면 '겨울 냉이' '강화유리멘털'이되는 그런 날도 오지 않을까.